호텔신라와 HDC의 합작사인 HDC신라면세점이 9년만에 유상증자를 단행한다. '1차 면세점 대전'이 벌어졌던 2015년 이후 9년만의 자본확충이다. 경영 상태가 악화하며 결손금과 부채가 누적되자 재무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HDC신라면세점이 내년 말 특허 만료를 앞둔 만큼 사업을 연장하지 않고 특허권을 반납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돌려막기
HDC신라면세점은 지난 18일 이사회를 열고 400억원 규모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이번 유상증자에는 지분 50%씩을 갖고 있는 주주 호텔신라와 HDC가 참여해 각각 200억원을 투입한다. HDC신라면세점 관계자는 "재무안전성 확보를 통한 경영 정상화를 위해 유상증자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HDC신라면세점이 유상증자를 단행하는 것은 지난 2015년 7월 이후 9년만이다. 그러나 9년 전과 현재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당시 유상증자는 1차 면세점 대전에서 승기를 거머쥔 직후 단행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자본잠식 위기에서 내린 결단이기 때문이다.
HDC신라면세점은 앞서 신종자본증권을 통해서도 자본을 확충했다. HDC신라면세점은 2021년 처음 신종자본증권을 통해 300억원을 조달했다. 이어 2년 후인 지난해에는 6월 4회, 9월 3회 등 총 7차례에 걸쳐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이를 통해 지난해 조달한 자금은 565억원에 달한다.
HDC신라면세점이 차입이 아닌 신종자본증권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신종자본증권이 회계상 자본으로 계상되기 때문이다. 영구채로 불리는 신종자본증권은 이자가 제공되고 청산시 변제순위가 주식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채권과 비슷하다.
반면 만기가 통상 30년이고 재연장도 가능해 사실상 원금 지급 의무가 없어 주식과 비슷하게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된다. HDC신라면세점은 지난해 말 별도 기준 자기자본이 45억원에 불과해 완전자본잠식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에 자금을 조달하면서 자본도 늘릴 수 있는 신종자본증권을 택했다.
그러나 신종자본증권에는 통상 '스텝업' 조항이 붙는다. 채권 발행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금리를 올려주는 조항이다. 때문에 신종자본증권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회사들은 콜옵션을 통해 스텝업 이전에 자금을 조기상환한다.
지난해 HDC신라면세점이 발행한 7차례의 신종자본증권도 발행 1년 후인 올해 연이율에 연 5.0%를 가산하는 조항이 붙어있다. HDC신라면세점은 올해 스텝업에 앞서 차환을 위해 올해도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일종의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부채비율 6215%
HDC신라면세점은 2015년 5월 호텔신라가 50%, HDC(당시 현대산업개발), HDC의 자회사 HDC아이파크몰(당시 현대아이파크몰)이 각각 25%의 지분을 출자해 설립한 합작법인이다. 정부가 그해 15년만에 처음으로 서울 시내면세점 3곳을 신설하기로 결정하면서 이 신규 특허 취득을 위해 설립됐다. 호텔신라의 면세점 노하우와 함께 교통의 요지인 용산역 아이파크몰이라는 부지를 내세우면서 HDC신라면세점은 같은 해 7월 단숨에 신규 특허를 따냈다.
HDC신라면세점은 이후 같은 해 11월 2차 면세점 대전, 2016년 10월 3차 면세점 대전에서도 신규 특허에 도전했다. 이때는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타워를 내세워 강남권 면세점을 연다는 계획이었지만 높은 경쟁률을 뚫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HDC신라면세점은 사업 초기 경쟁사들과 달리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오픈 2년만인 2017년에는 매출액 6819억원, 영업이익 53억원을 내며 흑자 전환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국내 면세시장 경쟁이 심화하면서 HDC신라면세점의 성장세도 멈췄다.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사태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유커)의 발걸음이 뚝 끊기면서 중국 보따리상(다이궁)에 의존할 수밖에 없자 송객수수료 비용이 치솟기 시작했다.
1~3차 면세점 대전을 거치면서 서울 시내면세점은 13곳까지 늘어난 상황이다보니 송객수수료 경쟁은 더욱 치열했다. 이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한화갤러리아, 두산 같은 대기업 신규사업자도 면세업 시장에서 발을 뺐다.
이어 2020년 터진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국내 면세시장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최근 들어 외국인 관광객이 돌아오고는 있지만 면세시장 회복세는 여전히 더디다. 특히 면세사업은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다. 하지만 HDC신라면세점은 단일 매장 한 곳만 운영하고 있어 타격이 더욱 컸다.
실제로 HDC신라면세점은 2019년 매출액 7694억원, 영업이익 108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쓴 이후 실적이 계속 악화하고 있다. 매출액은 지난해 2157억원까지 쪼그라들었고, 2020년부터 4년 연속 손실을 내고 있다.
HDC신라면세점의 손실이 지속하면서 결손금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다. 2019년 75억원이었던 결손금은 지난해 1310억원으로 늘어났다. 결손금 누적으로 자본을 까먹으면서 별도 기준 부채비율은 2021년 467.8%, 2022년 2580.9%, 지난해 6215.8%까지 치솟았다.
HDC신라면세점의 손실이 누적되자 호텔신라와 HDC는 2022년부터 HDC신라면세점의 지분법 적용마저 중단했다. 이들이 보유한 지분의 장부가액이 0원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업 접을까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HDC신라면세점이 시내면세점 특허를 반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HDC신라면세점은 지난 2020년 5년의 특허 연장 심사를 통과해 내년까지 아이파크몰 내 면세점을 운영할 수 있다.
하지만 당분간 국내 면세시장은 회복이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 매장 한 곳만 운영하는 HDC신라면세점이 사업을 지속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HDC신라면세점이 사업권을 완전히 반납하지 않는다면 판매장 면적을 줄일 가능성도 있다. 그간 HDC신라면세점이 완전자본잠식을 코앞에 둘 때까지도 두 모기업이 유상증자 등의 자금 지원도 하지 않은 점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HDC신라면세점은 올해 희망퇴직을 단행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또 사무용품 적재 등으로 사용하던 일부 유휴 공간을 아이파크몰에 반납했고, 면세점 전용 주차장도 주말과 피크타임 등에 한해 아이파크몰과 공유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시내면세점 대전이 벌어진지 9년 정도 흘렀는데 당시 면세 특허를 취득한 기업들이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시장에서 발을 뺐다"며 "면세시장 회복 시그널이 크지 않은 만큼 시장 내 구조조정이 더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HDC신라면세점은 특허 연장 준비를 이미 시작했다는 입장이다. HDC신라면세점 관계자는 "특허 연장 심사를 준비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고 이에 앞서 지난 6월 소비자 중심 경영(CCM) 인증도 받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