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태계 교란종
90년대 말의 일입니다. 생태계가 외래종 포식자 때문에 무너질 우려가 크다는 기사가 연이어 나왔습니다. 그 유명한 '황소개구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 포식자가 없고, 일반 개구리보다 훨씬 커서 토종 포식자들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이슈가 됐죠. 특히 황소개구리가 개구리의 포식자인 뱀을 먹어치우는 영상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모두 아실 겁니다. 한국의 환경에 '너무 잘' 적응한 황소개구리는 생태계 교란종이 된 게 아니라 우리 생태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겁니다. 포식자가 없단 것도 옛말입니다. 새들이 황소개구리 맛을 알아버렸거든요. 지금은 평범한(?) 개구리 중 하나가 됐습니다. 우리 토종 생태계가 황소개구리 하나에 무너질 만큼 나약한 환경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최근 우리 이커머스 생태계에도 비슷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바로 2023년 하반기 시작된 'C커머스'의 한국 침공입니다. 그간 국내 이커머스에 다소 미적지근한 반응만 보였던 알리바바와 테무, 쉬인 등 중국계 이커머스들이 본격적으로 국내 서비스를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리는 2023년 기준 매출 170조원, 영업이익 23조원을 올리는 세계 최대의 이커머스 기업입니다. 테무(핀둬둬) 역시 매출 46조원, 영업이익 11조원으로 국내 1위 이커머스인 쿠팡을 훨씬 앞섭니다. 이런 기업들이 잇따라 한국을 먹잇감으로 보고 수천억원 규모의 투자를 한다하니 '생태계 교란'이 걱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초만 해도 알리와 테무는 월간 사용자 수(MAU) 기준 국내 2위권으로 올라서며 토종 이커머스를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황소개구리의 운명일까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알리나 테무가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생태계 교란종'이 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지난달 알리익스프레스의 결제 추정액은 1422억원으로 쿠팡(3조2213억원)은 물론 G마켓이나 SSG닷컴, 다이소, CJ온스타일보다도 적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는 확보됐지만 객단가가 낮아 눈에 띄는 매출을 만들기 힘든 구조가 굳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상 외로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낮은 신뢰도'입니다. 알리와 테무의 제품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중금속 함유 문제, 품질 불량 문제 등 수많은 이슈가 터져나왔습니다. 가격이 저렴해서 인기를 얻은 '테무깡'인데, 저렴한 가격엔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문제가 생길 거리가 없는 단순한 제품이야 상관없겠지만, 단가가 높아질수록 구매가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죠.
초저가도 '급'이 있다
물론 가격이 저렴하다고 다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지난해부터 국내 유통업계의 판을 뒤흔들고 있는 다이소가 대표적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다이소는 모든 제품이 1000~5000원 사이에 판매되는 초저가 유통 채널입니다. 하지만 다이소 제품을 구매하면서 여기에 유해물질이 가득할까, 인증도 받지 않은 제품이 팔리진 않을까 고민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습니다.
최근 이슈가 됐던 다이소표 건강기능식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약국에서 3만원대에 판매되는 건기식이 5000원에 판매된다 해서 문제가 있는 성분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죠. 다이소의 초저가는 '일단 팔고 보자'는 경쟁심에서 나온 초저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격을 우선 설정하고 그에 맞춰 제품의 구성을 바꾸는 식으로 '가성비 제품'을 구현하니 큰 테두리 내에서 품질 이슈가 발생하지 않는 겁니다. 실제로 다이소에서 취급하는 제품은 총 3만여 종에 달합니다. 전체 매출에서 국산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70%입니다.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오리온, 롯데웰푸드 등 각 파트의 선두 주자인 대기업들도 다이소의 매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건기식을 만들어 파는 업체 역시 대웅제약과 종근당건강 등 손꼽히는 제약사들입니다.
신뢰도와 가성비를 모두 잡는 '대기업표 가성비' 상품은 불황이 길어지면서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18일 이마트는 LG생건과 손잡고 '글로우:업 바이 비욘드'를 론칭하고 화장품 8종을 선보였습니다. 150㎖ 토너, 45㎖ 세럼, 50㎖ 나이트 마스크 크림 등의 가격이 '4950원'에 불과합니다.

소비자들이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 때문에 초저가 제품을 원하면서도 품질이나 안전성이 떨어지는 건 원치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 '초저가이면서도 믿을 수 있는' 제품을 선보인 겁니다. 다이소보다 저렴한 4950원에, 굴지의 화장품 기업인 LG생건이 만들었으니 품질과 안전성 역시 보장된다고 봐야겠죠.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참 깐깐합니다. 꼼꼼하다고 해야 할까요. 알리나 테무가 싸다고 무작정 구매하지도 않고, 대기업 제품이라고 무조건 믿고 사지도 않습니다. 그런 소비자들에게 단련됐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도 외국산 '황소개구리'들의 공격에 잘 맞서고 있는 거겠죠. 알리의 '초저가'와 다이소, 이마트의 '초저가'가 다른 이유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