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중국 베이징 출장을 가면서 환전을 따로 하지 않았다. 이전에 중국 여행에서 쓰고 남은 지폐 몇 장만 가지고 갔다. 나머지 경비는 모두 신용카드로 쓸 생각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부터 신용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동료가 환전해온 돈이 있었지만 현금은 금세 바닥났다. 베이징 시내 식당에서도 신용카드가 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식당 입구에서 신용카드가 되느냐고 먼저 물어봐야 했다.
경제 규모로 보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국의 수도에서 신용카드 쓰기가 불편하다는 점에 당황했다. 하지만 한 주재원의 말을 듣고 수긍이 갔다. "여기선 신용카드 잘 안 써요. 현금 아니면 핸드폰으로 결제하죠. 삐삐를 건너뛰고 '집 전화'에서 바로 핸드폰으로 넘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2015년 상하이 출장 때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지 못해 애를 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택시 호출 앱이 순식간에 대중화되면서 길거리에서 '손 흔들며' 택시를 잡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몇 달 뒤에서야 한국에선 카카오택시가 출시됐다. 중국의 발전 속도에 놀랐다.
문재인 대통령도 아마 중국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나보다. 최근 문 대통령은 '인터넷전문은행 규제혁신 현장방문'에서 "작년 말 중국을 방문했을 때 거리의 작은 가게까지 확산된 모바일결제, 핀테크 산업을 보고 아주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은산분리라는 대원칙을 지키면서 인터넷전문은행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넓혀주어야 한다"며 "인터넷전문은행에 한정해 혁신 IT기업이 자본과 기술투자를 확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산분리는 은행법을 통해 산업자본이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의 4% 이상(의결권 미행사시 10%)을 보유할 수 없게 은행과 산업 자본 사이에 설치한 '칸막이'이다. 칸막이를 걷어내면 산업 자본이 은행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은산분리 원칙을 지키자는 측에선 은산분리가 완화되면 재벌이 은행을 소유해 사금고처럼 활용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미국 등 선진국도 이를 우려해 은산분리 칸막이를 두고 있다.
하지만 세계로 눈을 돌리면 지킬 것은 지키되 시장은 키워야 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의 텐센트는 2014년 말 위뱅크(WeBank)로, 알리바바는 2015년 마이뱅크(MYbank)로 인터넷전문은행 영업을 시작했다. 위뱅크는 일년만에 누적 대출 금액이 400억 위안(약 6조6800억원)을, 마이뱅크도 일년만에 대출금이 492억 위안(약 8조2000억원)을 넘어섰다.
일본은 2000년에 이미 인터넷전문은행이 출범해 현재 8곳이 영업 중이다. 야후재팬이 운영하는 재팬넷은행, 다이와증권이 설립한 다이와넥스트은행,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운영하는 세븐은행 등 대주주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은행이 자리를 잡았다.
미국은 1995년 인터넷전문은행 출범 이후 40곳이 설립됐는데 현재 23곳만 영업을 하고 있다. 17개 인터넷전문은행은 경영실패로 문을 닫았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곳의 경쟁력은 더 강해졌다.
▲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한국은 어떤가. 국민은행, 하나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은 부동산대출을 기반에 두고 '천수답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경쟁이 없으니 혁신도 없었다. 지방은행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자기가 속한 '성'을 지키며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야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 2곳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늦게 출발한데다 은산분리도 완화되지 않은 '반쪽짜리' 출발이었다.
은산분리 완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일리는 있다. 은산분리 완화가 인터넷전문은행에서 시작해 결국 은행으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면 사금고처럼 운영될 것이란 걱정도 모두 수긍이 간다.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고 한국만 문을 꼭 걸어 잠글 수는 없다. 핀테크 산업에서 더 이상 뒤처지지 않게 문을 활짝 여는 동시에 재벌이 은행을 사금고처럼 운영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안정장치를 마련하면 된다. 예금자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금융감독원이 더 깐깐하게 감독망을 구축하면 된다.
현재 정부는 인터넷전문은행에 한해 은산분리를 완화하고 인터넷전문은행 허가를 추가로 내줄 계획이다. 인터파크, 네이버, SK텔레콤, 키움증권 등이 후보로 거론된다. 업계에서 추가로 1곳 정도의 인터넷전문은행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추가로 한 곳만 허가 내어주란 법도 없다. 경쟁력과 자본력을 갖추고 있다면 10곳이라도 허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편의점을 활용한 'CU뱅크'나 게임사와 연계한 'NC뱅크'가 나오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탄탄한 인프라와 독자적인 기술, 풍부한 자본력만 있다면 어느 기업이름 뒤에도 뱅크는 붙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중국에 가서 놀라는 일보다는 '여긴 이제야 도입 됐구나'라고 안도감을 느낄 날이 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