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거래소 한 곳에 다자은행이 제휴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9일 국민의힘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은행장들이 만난 자리에서 정진완 우리은행장의 발언이 화제다. 청년자금 확대, 기업대출 시 위험가중치 하향과 같은 타 은행장들의 요청 속 정진완 행장의 건의 내용에 금융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가상자산거래소 1위 업비트와 케이뱅크 간 제휴 종료까지 6개월 앞둔 시점. '1거래소 1은행'이란 원칙을 깨고 우리은행이 판을 바꾸기 위해 선택한 것은 '다자은행 카드'였다. ▷관련기사: 국민의힘 만난 은행장들 어떤 건의했나 들여다보니(2025.04.09)
금융당국은 아직은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어서 향후 정책 변화 가능성에 귀추가 주목된다.
하나·우리은행만 경험 없어
2018년 시행한 가상자산 거래 실명제에 따라 가상자산거래소에서 암호화폐를 사고팔려면 반드시 은행 실명 인증 계좌를 거쳐야 한다. 이 때문에 가상자산거래소들은 은행과 제휴를 맺고 있다.
단 가상자산거래소당 은행 한 곳만 제휴사로 둬야 한다. 자금세탁방지 우려 등을 이유로 금융당국이 내건 조건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사고 발생 시 혼란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거래소 5곳(업비트-케이뱅크, 빗썸-KB국민은행, 코인원-카카오뱅크, 코빗-신한은행, 고팍스-전북은행)은 국내 시중은행 및 인터넷전문은행들과 제휴 중이다.
올해 3월 23일까지 빗썸과 6년간 제휴 관계였던 NH농협은행을 제외하면 현재 5대 시중은행 중 하나은행과 우리은행만 가상자산거래소 사업 경험이 전무하다.
가상자산거래소는 은행이 꼭 잡아야 하는 사업으로 등극했다. 가상자산 거래를 위한 거액의 예치금을 유치할 수 있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5대 암호화폐 거래소의 총 예치금은 올해 1월 10조6561억원. 지난해 1월 5조2154억원보다 2배 늘었다. 관련 시장에서는 매년 규모 상승을 점치고 있다.
가상자산 정책 바뀔까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가상자산 시장·규제 변화의 흐름을 선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KB국민은행은 최근 가상자산거래소 제휴사가 되면서 은행에 새로운 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은행으로선 한층 급박해진 모양새다. ▷관련기사:빗썸 '1조원 머니무브' 첫날…'NH→KB' 대기자 수천명(2025.01.20), '웰컴! 빗썸' KB국민은행에 1조원 굴러들어온다(2025.03.17)
가상자산거래소 한 곳당 여러 은행이 제휴를 맺는 사례가 없는건 아니다. 이미 유럽연합과 일부 아시아 등 해외에서는 '1가상자산거래소-다자은행'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입금만 할 경우에는 은행뿐 아니라 애플페이, 페이팔 등을 통한 거래도 가능하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여러은행과 제휴를 맺는 게 맞다는 의견도 나온다. 거래소 보안사고 등의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어서다. 특히 소비자 이익이나 선택지 다양화 측면에서도 다자은행이 적합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1거래소-1은행'은 안정성을 이유로 제한을 해둔 것이지 법에 명시한 건 아니기에 금융당국에서도 확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분위기는 아니다. 다만 고액 현금 거래와 관련한 리스크 때문에 고민이 깊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1000만원 이상 고액 현금 거래가 발생하면 신고가 들어오게 되어 있고, 이를 통해 마약 거래 등의 범죄를 잡아낼 수 있는데 만약 다자은행을 통해 1000만원씩 분산한다면 범죄 가능성을 걸러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다자은행 방향이 맞긴해 고민이 많다"고 덧붙였다.
기회는 지금
우리은행이 이번에 '1가상자산거래소-다자은행' 의견을 내비친 건 6개월 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는 10월 가상자산거래소 업계 1위 업비트는 케이뱅크와의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다. 연장 여부는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업비트가 자금세탁방지 의무 불이행혐의로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 처분을 받았고, 케이뱅크는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있어 양측 다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 경우 우리은행이 업비트와 제휴 맺을 방법은 '1가상자산거래소-다자은행'뿐이다.
일각에서는 하반기 법인계좌 거래가 시작되는 만큼 업비트가 법인 고객을 다수 확보한 시중은행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한다. 익명을 요구한 가상자산거래 전문가는 "미국에서는 가상자산 기관투자자 거래량이 개인보다 4배 많다"면서 "업비트 입장에서도 법인 고객을 확보하고 있는 시중은행이 제휴사로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으로서는 우리은행이 제휴사가 되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케이뱅크가 연장되거나 혹은 하나은행이 제휴사가 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케이뱅크나 하나은행이 되는 건 업비트를 공략해온 우리은행에게 달갑지 않은 그림"이라면서 "차라리 다자은행 제휴 방식을 통해 채택 가능성을 높여보자는 전략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