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중견기업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업황부진, 경쟁심화 등 외부요인도 있지만 오너의 오판, 장기전략 부재, 혁신 실패 등 내부요인이 더 크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미해진 기업들의 경영 실패사례를 통해 기업의 갈 길을 모색해 본다.[편집자]
"당시 회장에게 올라가던 보고서는 천편일률적이었다. '현재 상황은 어렵지만 나아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경기가 좋아지면'이라는 단서가 달려있었다."
STX그룹은 수직 계열화로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해운-조선'으로 연결된 단단한 수직계열화는 STX그룹 성장의 근간이었다. 수직계열화는 계열사간 시너지를 내는 데 있어 최적의 포트폴리오다. 하지만 하나가 쓰러지면 나머지도 공멸하는 도미노의 함정도 안고 있다.
◇ 수직계열화의 '빛'
STX그룹의 주력사는 STX팬오션과 STX조선해양이다. 강덕수 회장은 STX팬오션을 국내 3대 해운사로 키웠다. STX조선해양은 한때 글로벌 4위 조선업체였다.
마침 경기도 좋았다. 각국의 물동량은 늘어났다. STX팬오션은 일감이 늘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벌크선으로는 국내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한진해운, 현대상선과 함께 국내 3대 해운사로 발돋움했다.
STX조선해양도 함께 성장했다. STX조선해양은 외연 확장에 주력했다. 세계 최대 크루즈선 제조업체인 아커야즈를 인수했다. 중국 다롄에 대규모 조선소도 건설했다. 이를 통해 '한국-중국-유럽'을 잇는 삼각편대를 구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내놨다.
▲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수직계열화를 통해 단기간 내에 STX그룹을 재계 12위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경기 민감 업종으로 수직계열화를 이룬 탓에 지난 2008년 이후 불어닥친 글로벌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후 회사 살리기에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STX그룹은 사실상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됐다. |
STX그룹을 이끌던 강덕수 회장은 '샐러리맨 신화'로 통했다. 맨손으로 시작해 M&A(인수·합병)로 재계 서열 12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강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수직계열화의 단맛을 본 그는 사업을 더욱 확장했다.
그는 STX팬오션과 STX조선해양으로 짜여진 단단한 고리를 믿었다. 그는 "해운을 하다보니 배가 필요했고 배를 만들다 보니 배에 들어가는 엔진과 부품이 필요했다"며 "우리 손으로 그것들을 만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가 맹신하던 수직 계열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 급성장했다. STX그룹은 창립 6년만인 지난 2007년 매출액 10조원을 돌파했다. 2011년에는 21개 계열사에 자산총액 21조9690억원 규모로 우뚝섰다.
◇ 수직계열화의 '그늘'
강 회장이 수직계열화를 선택한 이유는 한가지다.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직계열화의 단맛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해운과 조선 업황이 꺾였다. 한 줄로 세워놓은 STX의 수직계열화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해운업황을 가늠하는 BDI지수는 급강하했다. 선주들은 지갑을 닫았다. 아무도 배를 발주하지 않았다. 만들 배가 없으니 배에 들어가는 부품도 필요 없게됐다. 경기 민감 업종으로만 포트폴리오를 짠 까닭에 STX의 피해는 막대했다.
사실 강 회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수직계열화의 그늘을 알고 있었다. 그가 에너지, 건설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려 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해운과 조선 경기가 꺾이기 시작할 무렵 그는 '에너지 사업'을 강조했다.
문제는 이들 신규 사업이 수직계열화의 붕괴를 막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 STX 고위 관계자는 "부실 징후는 이미 2009년부터 있었다"며 "하지만 내부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형오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STX는 조선 중심으로 수직계열화된 회사인데 조선경기가 악화되다 보니 그룹이 위기에 빠졌다"며 "어떤 기업이든 위기를 겪을 수 있지만 다른 쪽에서 커버할 수 있는 지원군이 부족해 그룹이 와해된 것"이라고 말했다.
◇ 과도한 자기확신이 부른 참사
시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STX그룹을 향해 '적색 경보'를 발령했다. 그럼에도 STX그룹은 각종 대형 M&A 건마다 관심을 보였다. '자기 최면'에 빠진 STX그룹에게 이미 합리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은 망가진 지 오래였다.
수직계열화를 통해 단기간 내에 큰 성공을 거둔 탓이다. 그동안 승승장구했던 경험이 오히려 독(毒)이 됐다. 강 회장은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참모들의 조언에만 귀를 열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 오너의 과도한 자기 확신은 STX그룹을 몰락의 길로 몰아 넣은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경기만 좋아지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은 결국 그룹을 무너지게 했다. |
또 다른 전 STX그룹 관계자는 "그룹이 위기를 향해 치달을 때 허위보고가 난무했다"면서 "경영진들은 잘못된 정보를 오너에게 전달했고 오너는 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싸여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연강흠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낸 이들의 성공 경험이 과도한 자기확신을 낳았다"면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일을 크게 벌여 수습을 제대로 하지못한 측면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 STX그룹은 현재 채권단과 법원의 관리를 받고 있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그룹 주력계열사인 STX조선해양의 대표이사 자리에서도 물러났으며 사실상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상태다.
STX그룹의 각 계열사들은 경영 정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법정관리 중인 STX팬오션은 최근 주력사업을 중심으로 사업 재편에 나섰다. STX조선해양도 류종형 대표를 중심으로 회생에 주력하고 있다. 지주사인 ㈜STX는 종합 상사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