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달 30일 철강 및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두 산업 모두 중국 기업들의 공격적인 증설과 글로벌 경기침체로 제품 수요가 줄면서 주요 제품의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 경쟁력 악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안일한 위기의식과 뒤늦은 대처로 해운업이 위기에 빠지면서 국내 중후장대 산업의 경쟁력을 진단하고 장기적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 그 동안 국내 경제를 이끈 중후장대 산업 한 축인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컨설팅 결과에 관심이 쏠렸던 이유다.
철강협회 및 석유화학협회는 각각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과 베인앤컴퍼니에 국내 산업 경쟁력 진단을 비롯해 경쟁력 강화 방안을 의뢰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가 개선방안을 마련했다.
이들의 진단을 토대로 나온 개선안을 살펴보면, 철강업의 경우 ▲친환경 및 IT화를 통한 설비경쟁력 강화 ▲경쟁우위 품목의 M&A, 투자확대를 통한 고부가화 유도 ▲경쟁열위·공급과잉 품목에 대한 사업재편 지원 ▲고부가 철강재 및 경량소재 등의 조기 개발 ▲새로운 수출시장 개척과 부적합 철강재 유통방지 등이 골자다.
석유화학 산업은 현행 NCC 설비의 글로벌 경쟁력 유지와 O&M 서비스사업화 ▲경쟁열위 품목에 대한 사업재편 유도 ▲핵심기술 확보를 통한 첨단정밀화학산업 육성 ▲고부가 정밀화학산업 성장을 위한 대규모 클러스터 조성 ▲사고·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석유화학단지 관리 등이 5대 핵심전략으로 꼽혔다.
양 산업 모두 공급과잉 제품에 대한 설비감축을 위해 업계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하고, 경쟁력이 악화된 제품은 고부가 제품으로 생산설비 전환을 유도한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문제는 이번 개선안에 담긴 내용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고, 기존에 있던 내용을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특히 많은 돈을 주고 글로벌 컨설팅 업체에 의뢰한 결과치고는 많이 부족하다는 게 업계 평가다. 보스톤컨설팅그룹은 약 9억원, 베인앤컴퍼니는 약 20억원의 수임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철강업은 중국 철강사들의 밀어내기 수출로 수익성이 악화됐고, 전방산업인 국내 조선업의 수주 가뭄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다. 하지만 단순히 생산설비를 통합해 줄이는 방식으로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는 지적이다.
또 현재 처한 위기에 대비해 설비를 줄이면 이후 조선업 등 전방산업이 회복됐을 때 수요를 맞추기 힘들어 경쟁상대인 중국 등에 시장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석유화학의 경우, TPA와 PS 등의 공급과잉 현상은 몇 년 전부터 인식된 문제였다. 주요 수출국이던 중국의 자급률 증가와 수요 감소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고, 일부 생산업체는 생산라인을 다른 제품으로 전환하는 등의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공급과잉 현상은 여전해 수출길은 험난한 상태다. 이와 함께 고부가 제품으로의 전환, 원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LPG 활용 등도 업계에서 이미 진행하고 있는 사안이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기술장벽이 낮은 범용 제품 경쟁력은 높은 반면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 경쟁력은 글로벌 기업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 약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업체마다 고부가 제품이나 최근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등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신규 물질 개발이나 원료 절감을 위한 셰일자원 투자 등이 이뤄지고 있다. 정부가 제시하지 않아도 석유화학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는 의미다.
한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산업 경쟁력 개선을 위해 밑그림을 제시했다고 평가하지만 실제 적용할 만한 알맹이는 없었다”며 “다만 업계에선 지금의 위기를 인식하고, 변화하라는 신호를 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최대 경쟁자이자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을 위한 대책 등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 과거 중국은 철강과 석유화학 제품 등의 주요 수출국이었다. 지금은 공급과잉으로 구조조정 대상이 된 TPA 역시 2010년대 초반에는 수출 효자 제품 중 하나였지만 중국이 생산설비를 늘리며 자급률을 높이자 문제아로 전락했다.
중국은 더 이상 국내 철강 및 석유화학 산업의 주요 수출시장이 아니다. 오히려 대규모 생산설비와 원가경쟁력을 무기로 한 가장 위협적인 경쟁상대다.
익히 알려진 문제점을 진단하고 이미 시행 중인 개선안을 내놓는 것은 무의미하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의 진단을 바탕으로 정부가 내놓는 개선안이라면 구체적인 시행 방안이 있어야 한다. 이에 더해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문제 및 산업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정책, 장기적으로 국내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 제시한 개선안은 향후 정부가 직접 구조조정에 나서기 위한 명분 마련에 그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