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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천재지변보다 아픈 '파업'

  • 2016.10.07(금) 11:08

"마, 태풍은 괘안심더. 파업이 문제지예"

수화기 건너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현대차 울산공장에 생산직으로 입사했다. 올해로 입사 16년째다. 한때 노조 활동도 열심히 했다. '일한 만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머리띠를 동여맸다. 하지만 그는 지금 노조를 떠났다. 매년 습관처럼 반복되는 파업에 신물이 났다고 했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9년 전이다. 당시 현대차 노조 파업 취재차 울산에 들렀다가 그를 만났다. 서글서글한 눈빛에 순박한 얼굴이 좋았다. 이런저런 질문에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사측의 부당함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역설했다. 급기야 서울서 온 네가 현장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드느냐식의 항변도 있었다. 그래도 그가 좋았다. 순수해서였다.

이후에도 그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가끔 울산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물었다. 소주잔을 기울일 때도 있었다. 순박하고 혈기왕성했던 청년은 어느덧 30대 후반이 됐다. 현대차 노조의 파업이 있을 때마다 안부전화를 했다. "괜찮냐?"고 물으면 늘 대답은 같았다. "행님, 제가 누군교? 괘안심다".

그랬던 그가 어느날 노조 활동을 접었다고 했다. 놀랐다. 그토록 신념을 갖고 하던 일을
 갑자기 접은 이유가 궁금했다. "한번은 아가 묻대예. 아빠 또 파업하냐고". 7살배기 아이의 물음에 가슴이 덜컥했다고 했다. 아이에게 아빠는 '만날 파업하는 사람'으로 인식돼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고 했다.


노조 활동을 그만 둔 이유가 단순히 아이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는 복잡했던 당시의 심경을 소주 한 잔에 털어 넣으며 알 수 없는 웃음만 지었다. 이후 그는 조용히 지낸다고 했다. 노조 활동을 할 때는 몰랐던 것들을 한 발 물러나 지켜보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또 색다른 맛이 있다고 했다.

남부 지방 태풍 소식에 걱정이 돼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는 정작 태풍 이야기는 몇 마디 하지 않았다. 파업이 걱정이라고 했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는 복구가 가능하지만 파업에 따른 피해는 복구가 어렵다. 파업 피해 복구를 위해서는 현대차가 많이 팔려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어렵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총 24차례의 파업을 벌였다. 지난달 26일에는 12년 만에 8시간 전면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피해 규모는 차량 13만1000여 대, 출고가 기준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2조9000억원에 달한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판매 부진으로 이어졌다. 현대차의 지난 9월 내수 판매량은 전년대비 20% 감소했다.

현재 현대차 노조는 '벼랑끝 전술'을 펼치고 있다. 일단 오는 11일까지 파업은 없다. 다만 다음주쯤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이는 정부의 긴급 조정권 발동 여부에 따라 상황은 변할 수 있다. 만일 정부가 긴급 조정권을 발동할 경우 현대차 노조는 '총파업'으로 맞서겠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 노조의 파업으로 1차 협력업체의 손실만 1조4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1차 협력업체의 피해 규모가 이 정도라면 2차, 3차 업체들의 피해 규모는 더욱 클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차 노조가 고임금을 받고 있음에도 임금 추가 인상을 요구해 협력업체들까지 벼랑끝으로 몰고 간다는 비난을 받는 이유다.

"차가 팔리야 우리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거 아입니꺼. 차가 안팔리고 있다는 건 우리가 더 잘 압니더. 우야됐건 차가 팔리야 우리 월급도 오르고 집에 드갈때 얼라들 묵을 꽈자라도 하나 사갈 수 있는거 아입니꺼. 근데 임금 몇 푼 올리자고 이래 손놓고 있으니 답답합니더. 와들 멀리 안보고 가차운 것만 볼라카는지 참". 수화기 건너편 그의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이 묻어났다.


작년 현대차는 판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올해도 달성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내부에서는 작년 만큼만 해도 다행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만큼 상황이 어렵다. 지금 현대차가 가장 아픈 곳은 천재지변에 따른 피해가 아니라 파업이다. 바꿀 수 있지만 바꾸지 않기에 더 아프다. 그 중심에는 노조가 있다.

현대차는 노조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합의안을 도출한다는 계획이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측도 노조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노조도 내부적으로 같은 판단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늘 그래왔 듯 물밑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하기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떻게든 되겠지예. 늘 머 안그랬습니꺼. 노조는 노조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명분을 찾겠지예.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싶습니더. 울산 공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파업하는 거 원치 않는다는 거. 이젠 좀 우리도 집에 얼라들한테 당당해지고 싶다는거. 행님, 이건 꼭 좀 써주이소. 진짭니더"라고 말했다.

그와 통화를 마무리하며 "그래도 몸 조심하라"라고 전했다. 그는 "날 추워지면 함 내려 오이소. 뒷고기에 소주 한잔 하입시더. 참, 행님은 지랑 묵으면 김영란법인가 뭔가에 걸리는 것 아입니꺼? 그럼 우야노"하길래 "내가 산다. 걱정 마라"라고 했다. 그는 껄껄 웃으며 "잘 아는 싼집 있심더 거서 묵지요"했다.

차가 많이 팔리고 자연스럽게 월급이 올라 귀가길에 아이들을 위해 과자 한 봉지 즐거운 마음으로 사갈 수 있는 그런 날이 그들에게는 언제쯤 올까. 내년에는 파업 때문에 걱정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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