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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造船)의 몰락]②'민낯'이 드러나다

  • 2017.01.12(목) 15:59

작년 말 수주잔량 日에 추월‥영향력도 감소
지역 경제 큰 타격‥산업 전반으로 번질 수도

한국의 조선산업이 무너지고 있다. '세계 최고 조선 강국'의 타이틀을 내놓은 지는 한참 지났다. 경쟁 상대로조차 보지 않았던 중국에 밀렸다. 최근에는 우리가 제쳤던 일본에게도 뒤쳐지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 탓이 크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선박 발주가 줄었다. 어설프게 손을 댔던 해양플랜트는 독(毒)이 됐다. 최고라는 자만심이 화(禍)를 불렀다. 지금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한국 조선업의 원인과 현황, 정부의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 짚어본다. [편집자]


최근 국내 조선업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일본의 수주 잔량이 한국을 넘어서서다. 한국의 수주잔량이 일본에게조차 밀렸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일본의 조선산업은 한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그 산을 넘어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이 됐다. 일본을 이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위치가 바뀔 위기에 빠졌다.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준지는 오래다. 그나마 2위자리를 지키며 근근히 버텨왔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게마저 추월을 허락했다는 것은 한국의 조선 산업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업계가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 일본에게도 밀렸다


영국의 조선·해운 전문 분석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한국의 작년 12월말과 이달 초 기준 수주잔량은 1989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였다. 한국의 수주잔량이 2000만CGT 이하로 줄어든 것은 2003년 6월말 이후 13년 6개월만이다.

수주잔량 감소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수주 잔량이 일본에게 뒤졌다는 점이다. 같은 기간 일본의 수주 잔량은 2007만 CGT였다. 수주 잔량은 현재 남아있는 일감의 양을 말한다. 클락슨의 분석 결과는 한국 조선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일감이 일본보다 적다는 의미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의 조선 산업이 일본에 뒤쳐진 적은 없었다. 모든 면에서 한국의 조선 산업은 일본을 압도했다. 한때 한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던 일본은 한국에게 세계 1위 자리를 내 준 이후 잔뜩 움츠러들었다. 한국 조선업계는 일본을 경쟁자로조차 생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 자료:클락슨(단위:만CGT).

하지만 글로벌 조선업황 부진이 지속되며 상황은 바뀌었다. 중국은 한국을 추월했고 일본도 조용히 반격을 준비했다. 중국과 일본은 모두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정부의 지원이 미미한 한국의 조선업계는 수주잔량을 소진하는 것밖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국의 수주잔량이 일본에게 추월당한 가장 큰 원인은 발주 감소때문이다. 일감이 줄다보니 신규 수주량이 급감했다. 조선소는 기본적으로 도크가 비어서는 안된다. 도크가 계속 운영돼야 회사가 돌아갈 수 있다. 따라서 신규 수주가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조선업체들은 작년 극심한 수주가뭄에 시달렸다. 결국 투입은 없고 산출만 있었던 셈이다.

클락슨에 따르면 작년 전세계에 발주된 선박 척수는 총 480척이다. 이 중 한국은 59척을 수주하는데 그쳤다. 중국은 212척을 수주했고 일본도 64척을 수주했다. 비록 CGT로는 한국이 일본에 앞섰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다. 수주잔량도, 수주척수도 모두 일본에게 밀렸다. 이것이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한국 조선 산업이 처한 현실이자 민낯이다.

◇ '마산의 눈물'

한국 조선산업이 당면한 위기는 이 뿐만이 아니다. 수주잔량 감소 속도도 문제다. 실제로 한국의 수주잔량 감소 속도는 경쟁국가에 비해 훨씬 빠르다. 실제로 작년 말 기준 한국의 수주 잔량은 연초대비 35.9% 감소했다. 같은 기간 중국은 26.5%, 일본은 22.7% 줄었다.

수주잔량 감소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조선산업이 위기에 봉착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감이 빨리 떨어질수록 도크가 비어가는 속도도 빨라진다. 도크가 비게되면 조선업체들은 문을 닫아야 한다. 이미 중소형 업체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최근 경남 통영에 위치한 중소형 조선소인 성동산업의 골리앗 크레인 해체·매각은 한국 조선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과거 조선 강국이었던 스웨덴이 몰락하면서 초대형 크레인을 현대중공업에 단돈 1달러에 넘긴 사례인 '말뫼의 눈물'은 이제 '마산의 눈물'로 바뀌었다.

▲ 자료:클락슨(단위:만CGT)

업계에서는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한국 조선업계의 수주잔량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빠르면 올해 말쯤 시그널이 나올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 중소형 조선업체 관계자는 "인공호흡으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꼴"이라며 "이미 조짐을 보이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대로라면 연말이 되기 전에 대거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글로벌 조선업계에서의 비중도 줄어들고 있다. 현재 글로벌 조선업계는 한국, 중국, 일본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 한국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2011년을 정점으로 한국의 비중은 매년 감소세다. 반면 일본은 한국과 거의 비등한 수준으로까지 치고 올라왔다.

업계 관계자는 "일감은 줄고 업계 영향력은 감소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규 수주인데 올해 여건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중국과 일본은 정부의 지원 덕에 버틸 힘이 있지만 우리는 사실상 각자도생 체제여서 두배로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 넓고 짙어지는 불황의 그림자

업계에서는 현 상황 타개를 위해서는 국면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조선산업의 특성상 경기회복을 기다려야 해서다. 업계에서는 흔히들 '조선업 싸이클'을 이야기한다. 대략 35년에 한번 꼴로 조선업황이 호황과 불황을 오간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이론도 쓸모가 없게 됐다. 유례 없는 경기침체 장기화로 35년의 공식이 무색해졌다. 불황에는 버티는 것이 상책이라지만 지금은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다. 중소형 조선업체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대형 조선업체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한국 조선산업의 몰락은 우리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조선업종 근로자 수는 2015년 12월 21만300명에서 작년 12월 17만9300명으로 3만1000명 감소했다. 조선 빅3에서만 8000명이 회사를 떠났다. 불과 1년 사이에 대규모 실직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조선소가 몰려있는 경남 지역의 타격은 더욱 컸다. 작년 울산과 경남의 소매판매는 전년대비 각각 2%와 1.1% 감소했다. 해당 지역의 집값도 하락했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작년 전국 아파트값은 전년대비 1.41% 올랐다. 하지만 조선소 밀집지역인 거제는 4.55%, 창원과 통영도 각각 1.60%, 0.34% 하락했다.

업계 관계자는 "조선산업 부진에 따른 실업률 증가와 집값 하락을 단순히 지역 경제의 차원에만 국한해서 봐서는 안된다"며 "올해에도 대규모 구조조정에 예정돼있는 만큼 조선업 발(發) 불황의 그림자가 한국 경제 전체로 번져나갈 수 있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전에 이를 막아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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