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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과 45년…조양호 '영원한 비행 떠나다'

  • 2019.04.08(월) 13:55

故 조양호 회장 떠올리는 키워드
'2세, 승부사, 외교관, 리더, 가장' 그리고 KAL

8일 새벽 타계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을 세계적인 일류 항공사로 이끈 경영인이라는 것에 토를 다는 이는 드물다.

'창업주 2세'로 태어나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고, 또 가족과 본인의 과오로 근래 편치 않은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송보국(輸送報國)'이라는 심지 굳은 경영 철학을 꼼꼼하게 실천하면서 대한항공의 위상을 제고한 것 역시 그다. 대한민국 항공·물류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제시한 경영인이자 항공업계의 선구자였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① 한진가 2세 조양호

조 회장은 1949년 3월8일 인천광역시에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진가 2세 경영인이다. 조 회장은 서울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학한 데 이어 미국으로 유학해 메사추세츠주 쿠싱 아카데미(Cushing Academy)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인하대 공과대학 학사,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남가주대) 경영대학원 석사, 1988년 인하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을 취득하며 경영에 필요한 소양을 쌓았다.

대한항공에 몸 담은 건 1974년이다. 입사 후 45년간 정비·자재·기획·정보기술(IT)·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거의 모든 실무 분야들을 두루 거쳤다. 이는 조 회장이 국내 재계에서는 물론 세계 항공업계로부터 존경받는 입지를 다진 원천이 됐다는 게 그룹 내 평가다.

조 회장은 1984년 정석기업 사장, 1989년 한진정보통신 사장, 1992년 대한항공 사장에 차례로 올랐다. 이어 1996년부터 한진그룹 부회장을 맡으며 부친을 대신해 사실상 그룹을 이끌었다. 1999년 대한항공 회장을 맡았고, 부친이 타계한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도 승계했다.

그의 재직기간 동안 대한항공은 글로벌 선도 항공사로 거듭났다. 1969년 3월 만성적자를 내던 공기업 대한항공공사는 한진상사가 인수하면서 국적 민항사 대한항공으로 출범했다. 초창기에는 구형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뿐이었지만 현재 대한항공은 166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매출은 1969년 36억원에서 지난해 12조 6512억원으로 3514배 이상 커졌다.

② 승부사 조양호

스카이팀 창설 당시 조양호 회장(왼쪽서 세번째)/사진=대한항공 제공

위기도 많았다. 2000년대 초 미국과 일본의 유수 대형 항공사가 부도로 내몰렸다. 하지만 조 회장이 이끈 대한항공은 여러 위기를 겪어 내고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 항공업계 무한 경쟁 시대를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 Team)' 창설 주도로 타개한 것이다. 또 전 세계 항공사들이 경영 위기로 움츠릴 때 오히려 선제적 투자를 감행하며 역발상으로 대응했다.

1997년 괌 대한항공기 추락사고에 외환 위기까지 겹친 당시에는 자체 소유 항공기의 매각 후 재 임차를 통해 유동성 위기를 넘겼다. 1998년 외환 위기가 정점일 당시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주력 모델인 보잉737 항공기 27대를 구매했다.

그는 또 이라크 전쟁,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9·11 테러 등의 대형 악재 영향이 남아 항공산업 전반이 침체 늪에 빠진 2003년 무렵 A380 항공기 등의 대형 구매계약도 이끌었다. 결국 이 항공기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한항공 성장의 주력이 됐다.

저비용 항공사(LCC)의 난립으로 항공산업 경쟁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이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받아들였다. LCC를 토대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조 회장은 2008년 7월 진에어(Jin Air)를 창립해 업계의 변화 흐름에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③ 민간 외교관 조양호

조 회장은 민간 차원의 외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항공업 경영에 필요한 활동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국격을 높이는 결과로 돌아왔다.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대영박물관 등 세계 3대 박물관에서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게 대한항공이라는 사실은 이미 적잖이 알려져 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뢰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조양호 회장/사진=대한항공 제공

조 회장이 가장 오래 공들인 건 한국과 프랑스 간의 돈독한 관계다. 그는 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으로서 200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 2015년에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수훈했다.

조 회장은 몽골로부터는 외국인에게 수훈하는 최고 영예인 '북극성' 훈장을 2005년 받기도 했다. 대한항공이 몽골 노선에 뛰어들며 이 나라 하늘길 개척에 기여한 공을 인정 받아서다. 그는 장학제도 운영 등을 통해서도 양국 간 협력 동반자 관계를 확대 발전시켰다.

작년 동계올림픽 개최에도 조 회장은 주축 역할을 했다.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재임 1년 10개월간 50번에 걸쳐 해외 출장을 다녔다. 약 64만km(지구 16바퀴)를 이동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10명중 100명 정도를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유치 이후 2014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도 맡아 지지부진하던 준비를 마무리하고 올림픽을 본궤도에 올렸다.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정해졌을 때 현장에 참석한 조양호 회장/사진=대한항공 제공

조 회장이 이렇게 나랏일에 발 벗고 나서는 것은 군 현역경험이 밑거름이 됐다고 전해진다. 조 회장은 1970년 미국 유학 중 귀국해 군에 입대, 강원도 화천 소재 육군 제 7사단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다. 또 베트남에도 파병돼 11개월 동안 퀴논에서 근무한 후 다시 강원도 근무지로 돌아와 1973년 7월 만기 전역까지 36개월 복무 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④ 항공 리더 조양호

조 회장은 대한항공이라는 일개 기업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위상 자체를 바꾸려 했다. 특히 '항공업계의 UN(국제연합)'이라고 불리우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으며 한국 항공산업의 발언권을 높여왔다.

조 회장은 1996년부터 IATA의 최고 정책 심의 및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이후 2014년부터는 31명의 집행위원중 별도 선출된 11명으로 이뤄진 전략정책위원회 위원도 맡아왔다. 이런 활동 영향으로 올해 IATA 연차총회는 사상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다.

이런 위상 제고는 국가 항공산업 경쟁력 강화로도 이어졌다. 2010년대 미국과 일본 항공사들이 잇따라 조인트 벤처(JV)를 세우면서 환승 경쟁력이 떨어진 것을 간과하지 않은 것이다. 조 회장은 델타항공과의 JV 추진이라는 해법을 내놨다. 여기에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을 발판 삼아 환승 경쟁력을 다시 키우고 있다.

⑤ 가장(家長) 조양호

2018년 9월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 출석한 조양호 회장/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만사가 평탄치는 않았다. 과거 그룹 승계 과정에서 둘째 동생 조남호와 셋째 고 조수호, 막내 조정호에게 각각 한진중공업, 한진해운, 메리츠금융지주를 분할했는데 이 과정에 재산 분할 등 여러 잡음이 있었다.

경영인으로서는 한진해운을 가장 아프게 여긴 것으로 전해진다. 한진해운은 동생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을 이어 제부인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이 경영했다. 하지만 한진해운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영 위기를 맞자 2013년 한진그룹이 1조원 이상 들여 인수해 이를 살리려 했다. 하지만 결국 회생에는 실패했다.

조 회장은 2014년에는 한진해운 회장직에 오르고, 2016년 자율협약 신청 이후 사재도 출연했다. 그러나 결국 한진해운은 2016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이듬해 청산됐다. 그룹을 '육·해·공 물류 전문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공언했지만 그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올해 조 회장은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여기에는 2014년 장녀인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 2018년 차녀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갑질' 논란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부인 이명희 여사의 폭언 등도 조명됐다. 가족들의 행태에 여론이 악화된 속에 2대주주 국민연금이 연임 반대 결정을 내렸다.

⑥ KAL 조양호

대한항공 내부에서 조 회장은 '시스템 경영론'을 강조해왔다. 최고 경영자(CEO)는 시스템을 잘 만들고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하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그러면서도 절대 안전을 지상 목표로 하는 수송업이야 말로 현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경영자였다. 수행 비서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며 서비스 현장을 돌아보고 안전에 저해되는 요소가 없는지 면밀히 살피기도 했다. 접객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생생한 의견을 듣기도 했다.

한진그룹 측은 "조 회장은 평생 가장 사랑하고 동경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며 "하지만 조 회장이 만들어 놓은 대한항공의 유산들은 영원히 살아 숨쉬며 대한항공과 함께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룹은 현재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사장단 회의에서 주요 현안에 대한 의사 결정을 진행해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조 회장은 8일 새벽(한국시간) 미국 현지에서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그는 지난해 말부터 건강을 돌보기 위해 로스엔젤레스(LA) 뉴포트비치 별장에 머물러 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명희(전 일우재단 이사장·70)씨와 아들 조원태(대한항공 사장·44)씨, 딸 조현아(전 대한항공 부사장·45)·조현민(전 대한항공 전무·36)씨 등 1남 2녀와 손자 5명이 있다. 부인과 세 자녀가 현지에서 임종을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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