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판'으로 이름난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간 '망 사용료' 소송의 2막이 열렸다. 넷플릭스는 1심에서와 달리 2심에서 망 사용료를 내지 말아야 할 새로운 논리를 펼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 강조했던 '접속은 유료, 전송은 무료', '망 중립성' 개념을 항소이유서에서 빼버려 눈길을 끈다.
23일 서울고등법원 제19-1민사부는 넷플릭스가 SK브로드밴드를 상대로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소송 항소심 변론준비기일을 진행했다. 변론준비기일이란 정식 변론에 앞서 청구인과 피청구인의 주장을 바탕으로 소송 쟁점을 점검하는 절차다.
앞서 넷플릭스는 2019년부터 SK브로드밴드 측이 망 사용료 협상을 제기한 데 대해 '우리는 낼 의무가 없다'며 채무(망 사용료) 부존재 확인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6월 1심 재판부는 넷플릭스 측 주장을 기각했으나, 넷플릭스가 항소심을 제기하면서 2심 절차가 시작된 것.
이날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574호 조정실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변론준비기일은 단 14분 만에 종료됐다. SK브로드밴드 측 변호를 맡고 있는 강신섭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는 "오늘 재판은 사실상 진행된 게 없다"며 "재판부가 이 재판은 어떻게 진행하겠다 이런 취지를 얘기한 정도"라고 말했다.
SK브로드밴드 측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항소이유서에 새로운 논리를 추가하지 않았다. 넷플릭스는 지난 9월 재판부에 항소이유서 제출 마감일을 11월로 연장 요청한 바 있다. 이에 업계에서는 넷플릭스 측 변호를 맡고 있는 김앤장이 1심 재판을 뒤집을 만한 논리를 보강할 것이란 추측이 나왔다.
실종된 '글로벌 인터넷 기본원칙'
오히려 넷플릭스는 1심에서 주장한 핵심 논리를 거둬냈다. 바로 넷플릭스가 국내 시장에서 최초로 제시한 인터넷 '접속'과 '전송' 이원론이다. 넷플릭스는 자사와 같은 콘텐츠제공사업자(CP)는 직접 접속한 인터넷제공사업자(ISP)에 대해 '접속료'만 지급하면 되고 접속 이후 트래픽을 전송하는 다른 ISP에 대해, 즉 '간접 접속한 구간'에 대해선 '전송료'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터넷의 기본원칙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넷플릭스는 자국 내 ISP 등에 접속료를 이미 지급했으므로 SK브로드밴드 같은 하위 ISP에 별도의 망사용료를 낼 의무가 없다는 주장이다. SK브로드밴드가 이용자(고객) 또는 다른 ISP에 연결하는 행위는 '전송'에 해당하는 만큼 사용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망 중립성' 논리도 실종됐다. SK브로드밴드가 2019년 넷플릭스에 망 사용료 지급에 관한 협상을 제시한 이유는 국내 넷플릭스 가입자가 늘면서 트래픽이 과도하게 발생한 탓이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 측은 '통신사가 자사망에 흐르는 합법적 트래픽을 불합리하게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인 망 중립성 개념으로 맞섰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에서 '인터넷 기본원칙'을 스스로 철회한 게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온다. 넷플릭스의 접속·전송 이원론은 국내 전기통신사업법 등 법리를 뛰어넘는 논리로 인터넷 업계나 법조계의 공감을 전혀 얻지 못했다. 1심 재판부는 망 중립성 역시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며 냉정히 판단한 바 있다.
강신섭 대표변호사는 "(넷플릭스 측이) 그 전의 논리를 강조했을 뿐이지 새로운 논리는 전혀 없었다"며 "1심에서 원고 주장의 주된 취지가 인터넷 기본원칙과 CP가 ISP가 돈을 내는 것은 망중립성에 위반된는 것이었는데 항소심에선 그 주장이 싹 빠졌다"고 말했다.
양측은 더 이상의 변론준비기일 절차 없이 내년 3월16일 곧장 변론에 들어간다. 재판부는 더 넓은 공간에서 순수히 구술로만 변론을 진행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넷플릭스를 포함해 구글(유튜브) 등 해외 CP가 국내 ISP에게 망 사용 대가를 내야 한다는 근간이 되는 재판이므로 워낙 세간의 관심이 뜨거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