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강화하는 유럽연합(EU)의 핵심원자재법(CRMA·Critical Raw Material Act) 초안 공개가 임박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으로 선공에 나서면서 EU도 비슷한 법안으로 압박하는 국면이다.
이에 국내 배터리 업계를 비롯한 관련기업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 원자재 비중이 높은 기업들의 경우 미국에 이어 유럽에서마저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초안 발표 초읽기 ‘원자재 품목·수치’ 관건
주요 선진국들이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판 IRA’로 불리는 CRMA 초안이 14일(현지시각) 공개될 예정인 가운데 국내 배터리 업계도 이를 예의주시 중이다.
이번 초안에는 리튬과 희토류 등 전기차 배터리에 탑재되는 핵심 원자재에 대한 EU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구체적으론 ‘원자재 재활용 역량 확대’와 ‘원자재를 역내에서 10% 이상 채굴하고 정제·제련 공정의 40%를 역내에서 해야한다’는 등의 단서가 담길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EU는 미국과의 경쟁에 대응하고 중국산 광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지난해부터 CRMA의 입법을 추진해 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각종 이슈로 역내 공급망 불안정성이 높아진 것도 주효했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 실장은 “러-우 전쟁과 미-중 갈등 고착화 가능성이 커지면서 특정국, 특히 중국 의존도가 높은 품목들을 관리할 필요성이 EU 내에서 대두됐다"고 밝혔다. 이어 "핵심 원자재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면 역내 제조업에 타격이 있기 때문에 제조업 강화 측면이 있다”며 “환경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선도의지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국내 업계의 희비를 가를 부분은 해당 법안이 ‘어떤 원자재 품목을 몇 퍼센트로 지정할지’다. 핵심 광물의 처리 및 가공 공정 대부분이 중국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기준 이차전지 양극재에 쓰이는 탄산망간과 수산화리튬의 중국 의존도는 각각 100%와 84%다.
이에 대해 조 실장은 “가령 CRMA에서 ‘특정국에 대한 원자재 수입 의존도를 70%로 이하로 억제하겠다’고 한다면 음극재·양극재 원자재의 8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는 국내 배터리 업계는 단순 계산 시 10%포인트(p)만큼의 부담을 지게 되는 셈”이라며 “이 경우 단기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수입선을 찾는 것이 우선이고 대응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美·EU 보호주의 전쟁…공급망 변화 시급
이번 대책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공개한 친환경 산업 육성 청사진 ‘그린딜 산업계획’의 일환이다. 신규 생산시설 신속 인허가 등 계획을 담은 ‘탄소중립산업법(Net-Zero Industry Act)’도 같은 날 발표된다.
앞서 지난 9일(현지시각) EU가 발표한 ‘한시적 위기 및 전환 프레임워크(TCTF)’도 이와 궤를 함께한다. TCTF는 오는 2025년까지 첨단 산업 중 보조금 때문에 역외로 떠날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해당 지역과 동일한 보조금을 주겠다는 게 골자다. 역시 미국 IRA 보조금에 맞선 대책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CRMA 초안 공개를 앞두고 숨 죽이는 모양새다. 일단 초안을 살펴봐야 유럽 시장에 대한 투자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할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이다. 북미와 유럽 양대시장을 동시 공략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럽의 전기차 판매량은 약 162만대로 미국(약 80만대)보다 2배 이상 높았고, 올해 유럽 배터리 시장의 성장률은 40%가량으로 점쳐진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SK온과 삼성SDI는 헝가리에 각 공장을 두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CRMA의 핵심이 원자재 수급 제한이기 때문에 기업의 공급망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IRA처럼 보조금 등을 통한 혜택으로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고 중국 배터리 업계와의 유럽시장 경쟁도 염두해야 하기 때문에 초안 발표 이후 대책 마련을 적극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배터리 3사와 산업통상자원부는 CRMA 대응을 위해 최근 EU를 방문했다. CRMA 초안 발표를 앞두고 정부와 관련 기업들이 공동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차원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