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핵심원자재법(CRMA·Critical Raw Material Act) 초안이 공개됐다.
초안은 사전에 공개됐던 내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국내 업계는 다소 안도하는 분위기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과 같이 보조금 규모 등 구체적 혜택을 내걸지 않아 정책의 효과도 미미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배터리 업계에서는 CRMA가 자국 중심 법안으로 국내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해왔다. EU가 IRA에 대응해 내놓은 법안이어서다.
다만 이번에는 초안만 공개인 만큼, 구체적인 법안이 나오기까지 예의주시해야 할 전망이다.
EU 공급망 확충, 中 견제
16일(현지 시각) EU 집행위원회는 EU 역내 원자재 공급 안정성 확보를 목적으로 한 CRMA 초안을 공개했다. CRMA는 특정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 축소 및 역내 투자 확대가 골자다. 오는 2030년까지 EU 연간 전략 원자재 소비량의 10% 추출, 40% 가공, 15% 재활용 역량을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EU 연간 소비량의 65% 이상을 단일한 제3국에 의존하지 않도록 수입 다변화에 나선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항목으로 풀이된다.
EU는 CRMA 설명 자료에서 "전 세계 영구자석에 사용되는 희토류는 중국에서 100% 정제되고 EU 마그네슘 공급의 97%가 중국에서 조달된다"고 밝히면서 "이차전지에 사용되는 전세계 코발트의 63%는 콩고에서 추출돼 중국에서 60%가 정제된다"고 설명했다. 초안에서는 '제3국'이라는 표현에 그쳤지만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셈이다.
물론 CRMA는 원자재 70~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배터리 업계엔 악재다. 다만 법안 내용이 원론적인 내용에 그친데다 예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다소 안도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예상했던 내용에 그쳐 일단은 한숨 돌린 상태"라면서도 "향후 구체적인 안을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자료를 통해 "핵심원자재법 초안은 미국 IRA와 달리 역외 기업에 대한 차별적인 조항이나 현지 조달 요구 조건 등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분석을 내놨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초안에는 IRA와 같은 보조금 요건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IRA가 북미 지역에서 생산하거나 FTA(자유무역협정) 체결국에서 채굴·가공한 핵심광물을 사용한 제품에 한해 전기차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업계에서는 'CRMA가 IRA에 비해 업계에 미칠 영향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내놓는다.
문경원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미국 IRA와 비교해보면 목표 달성을 위한 차별적 재정 지원이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정책의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안나 유안타증권 연구원도 "아직 초안으로 세부 사항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차전지 정책은 미국 IRA 정책으로 인한 수혜가 더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직 한숨 돌리긴 이르다
다만 이번에 발표된 법안은 EU 집행위의 초안이다. 향후 유럽의회 및 각료이사회 협의 등을 거쳐야 해 입법 과정만 1~2년 정도 소요될 전망이다. 아직 안심하기 이른 셈이다.
게다가 이번 초안에는 역내 진출한 대기업에 주기적으로 공급망 감사를 실시한다는 조항도 포함돼 있다. 500명 이상, 연간 매출 1억5000만유로(약 2100억원) 이상인 대기업이 대상이다. 유럽 현지에 진출해 있는 국내 기업이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SK온과 삼성SDI는 헝가리에 각각 공장을 두고 있다.
전기차 모터 부품인 영구자석의 재활용 비율과 재활용 가능 역량에 관한 정보공개 의무화 조항이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향후 세부 조항에서 배터리 재활용을 의무화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초안이 공개됐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 것은 아니라 아직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상황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산업부도 업계에 미칠 위기와 기회 요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자 내주 기업 간담회 등을 통해 논의할 예정이다. 산업부는 "업종별 영향 등을 상세히 분석해 구체적인 대응 계획을 수립, 우리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기회요인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EU와 지속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