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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맨 오너들

  • 2014.03.31(월) 17:59

# '갓끈 매지 말랬는데..."

"이성계가 지은 명백한 죄가 있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 끈을 고쳐 맨 죄. 서당의 학동이 '대학연의'를 본다한들 누가 눈을 꿈쩍하겠느냐. 동북면의 막강한 사병을 거느린자가 이런 저런 핑계로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면서 제왕의 학문을 학습하였다 하니 역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나라가 들썩거리는 건 당연하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드라마 '정도전'에 나온 한 장면이다. 고려말 최대 권력가인 이인임은 이성계가 역심을 품고 있다며 그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도를 찾는다. 그 빌미로 삼은 게 이성계가 읽고 있던 '대학연의'다.

칼과 창을 가진 무장(武將)이 제왕학의 정수인 '대학연의'를 읽었으니 쿠데타를 꿈꾼 것이고, 설사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의심받을 짓을 한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게 이인임의 논리다. 드라마일 뿐이지만 이인임과 이성계의 힘겨루기 장면은 낯설지 않다. 현실 정치에선 정치공학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고 법조계나 재계 또한 이러한 '감(感)' 없이는 생존하기 어렵다.

# SK家 `주식사는 사촌형`

▲ 최신원 SKC 회장

최근 최신원(62) SKC 회장이 SK그룹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최신원 회장은 지난해 말부터 SK㈜를 비롯해 SK C&C·SK하이닉스·SK브로드밴드·SK케미칼·SKC솔믹스 등 SK그룹 계열사 지분을 꾸준히 매입했다. 넉달간 계열사 지분매입에 들인 돈은 50억원 가까이 된다. 지분율 자체는 미미하다. 지주회사인 SK㈜와 그를 지배하는 SK C&C에 대한 최신원 회장 지분율은 각각 0.01%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룹의 총수인 최태원(54) SK그룹 회장과 그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이 수감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사촌 형인 최신원 회장의 지분매입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SK그룹의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의 차남이다. 형인 최윤원 SK케미칼 회장은 2000년 작고했기 때문에 최신원 회장은 창업주의 직계가족 중 맏이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일까. 그가 SK그룹 계열사 지분을 살 때마다 증권가에선 '혹시?'하며 신경을 세우는 이들이 종종 있다.

 

최태원 회장이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기로 한 것은 1998년 8월말이다. 아버지인 최종현 회장 작고 뒤 SK그룹에서는 이틀에 걸친 가족회의가 열린다. 가족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은 이렇다.

 

"최 부사장(現 최태원 회장) 1인의 재산상속은 현재 대주주들이 가진 재산을 그가 독점한다는 뜻이 아니라 SK 계열사에 대한 대주주의 모든 대표권을 최 부사장에게 위임한다는 의미다" (동아일보 1998년 9월1일)

 

최태원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승계한다는 내용이지만 이를 '위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완전히 넘겨준다기보다는 맡긴다는 의미가 크다. 최신원 회장도 몇년전 언론 인터뷰에서 계열분리 가능성을 언급했다.

최신원 회장이 단지 갓끈을 매는 것인지, 정말 자두(오얏)를 따는 것인지 지금 당장 알 순 없어도 그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머뭇거린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워보인다. SK그룹 관계자는 "(최신원 회장이) 그룹에 애정이 있어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며 답답해했다.

 

▲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사촌형인 최신원 SCK 회장이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 효성과 롯데는 안녕하십니까

효성과 롯데도 형제간 지분매입으로 관심을 끈 그룹에 속한다.

 

효성은 조석래(79)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46) 사장과 삼남인 조현상(43) 부사장이 지분을 잇달아 매입해 형제간 지분경쟁 가능성이 부각됐다. 특히 아버지와 형이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조현상 부사장의 지분매입은 남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 조현상 효성 부사장

현재 조현준 사장과 조현상 부사장의 효성 지분율은 각각 9%대로 별로 차이나지 않는다. 조석래 회장의 차남인 조현문(45) 부사장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지분을 정리했다. 반면 조현상 부사장은 올해 주주총회에서 효성의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는 등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조현상 부사장은 원하든 아니든 오얏나무 그늘 아래 들어섰다.

롯데그룹도 형인 신동주(60) 일본롯데 부회장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초까지 한국의 롯데제과 주식을 사들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은 동생인 신동빈(59) 회장이 맡아 경영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은 상황에서 형인 신동주 부회장이 한국롯데의 모회사격인 롯데제과 지분을 사들이면서 승계구도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니냐는 얘기가 그룹 내부에서도 나왔다.

# 오얏나무 아래 기업들

이성계는 '불온서적인지 몰랐다'며 임금 앞에 석고대죄를 했다. 그걸로 모자라 자신의 딸을 이인임 집안과 혼인시켜 이인임의 '당여(黨與·지금의 정당과 비슷한 집단)'가 되는 걸로 위기를 벗어난다. 만약 이성계가 변방에 앉아 계속 갓끈을 만졌다면 어땠을까.

재벌가 형제들의 싸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현대·한진·두산·삼성 등 내로라하는 그룹들에서 경영권과 상속재산을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금호가(家)도 처음엔 사이좋은 형제경영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최근 오얏나무에서 갓끈을 매는 재벌오너들을 보면서 이들 기업들이 오버랩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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