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이 생일, 기념일 등 특별한 날에 한우를 드실 겁니다. 한우 이야기를 하려면 눈꽃처럼 사르르 퍼져 있는 '마블링(marbling)'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국가에서 한우 등급을 매길 때도 이 마블링이 가장 큰 기준이 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 '블링블링' 마블링 넌 누구니
마블링은 육류의 지방 분포율을 뜻합니다. 고기에 지방이 고르게 퍼져 있는 모습이 마치 대리석 무늬처럼 보여 붙은 이름인데요. 마블링이 풍부할수록 고기의 육즙과 풍미, 부드러움이 더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생산된 모든 소고기는 유통되기 전 '육량등급'과 '육질등급'이 매겨집니다. 육량등급은 소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고기의 양이 많고 적음을 나타내며 A, B, C등급으로 구분됩니다. 주로 소고기 유통과정에서 거래지표로 쓰입니다.
반면 육질등급은 고기의 품질을 나타내며 ▲1++ ▲1+ ▲1 ▲2 ▲3 등 다섯 등급으로 나뉩니다. 소비자들이 소고기를 선택할 때는 일명 '투뿔'로 대표되는 육질등급을 주로 고려하게 되는데요.
이 육질등급을 나눌 때 최우선 기준이 마블링입니다. 소고기는 근내지방도, 즉 마블링에 따라 예비등급을 매긴 뒤 ▲육색 ▲지방색 ▲조직감 ▲성숙도 등 세부 항목의 품질을 종합하여 등급을 판정한다고 하는데요.
세부 항목은 감점식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별다른 감점 요인이 없다면 마블링으로 판정된 예비등급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결국 정부는 소고기에 있어 마블링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 "마블링 적어도 맛만 좋던데"
소고기 등급제는 한우 소비에 큰 영향을 줍니다. 지난 4월 서울 마장동 축산물시장을 찾아 확인해보니 등급별 한우 가격에 큰 차이가 있었는데요.
구이용으로 사랑받는 갈비살의 경우 1++등급 한우는 100g당 1만1천원, 2등급 한우는 8천500원에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부위여도 등급에 따라 약 30% 가격이 차이나는 건데요. 그만큼 소비자들은 마블링 많은 한우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등급간에 넘을 수 없는 맛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장동에서 만난 축산물 유통업자 A씨는 "2·3등급 한우는 1++등급 한우보다 지방이 적어 상대적으로 맛이 담백하다. 저등급 한우만 찾는 고객도 많다"며 "외국인 손님들도 기름기 적은 저등급 한우를 많이 찾는다"고 귀띔했습니다.
1++한우와 저등급 한우의 맛 차이는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한 정도라는 뜻이죠. 그럼에도 등급간에 소비자 선호도가 큰 차이를 보이는데요. 여기에는 지방 함량으로 소고기를 줄세운 현행 등급제도가 한 몫 한 것으로 보입니다.
◇ 소고기 등급제는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면 마블링을 중시하는 현행 소고기 등급제는 어디서 온 걸까요? 정부는 지난 1993년 소고기 수입개방에 대비하고, 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처음으로 소고기 등급제를 시행했는데요. 새 제도를 만들 때 축산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참고했습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등급제 도입 초기에는 1등급을 미국 8개 소고기 등급 중 최상위 등급인 프라임(prime)보다 약간 높은 수준으로, 2등급은 미국 차상위 등급인 초이스(choice) 등급과 대응할 수 있도록 설정했다고 합니다. 등급 판정 기준과 판정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시찰과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고요.
중요한 것은 미국과 일본 모두 마블링을 중심으로 한 소고기 등급제를 운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마블링을 중요시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하다 보니 한국도 자연스럽게 마블링을 소고기 등급판정의 제1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이죠.
◇ 마블링을 얻고 한우가 내준 것
이렇게 정착된 마블링 중심의 현행 등급제는 한우 맛을 '기름 맛'으로 획일화할 뿐만 아니라, 한우 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소를 오래 키울수록 마블링이 늘어나기 때문인데요. 문제는 생산성이 떨어지면, 수입 소고기에 맞서는 한우의 가격 경쟁력도 함께 떨어진다는 겁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우리 농가는 한우를 출하하기 위해 평균 31.2개월 동안 사육한다고 합니다. 반면 일본 와규는 평균 사육 기간이 28.8개월, 미국의 소 사육 기간은 16개월에서 22개월에 불과합니다. 소고기 등급제 기준은 세 나라가 비슷하지만, 사육 환경은 크게 달라 생산성 차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를 살찌우기 위해 풀이 아닌 옥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곡물배합사료를 먹이는 것도 생산성을 낮춥니다. 곡물배합사료는 풀보다 비쌀 뿐더러, 사료 원료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국제 곡물가격이 오르면 한우 가격 역시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한우 가격은 계속해서 오르고, 소비자들은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한우보단 수입 소고기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축산물품질평가원 평가R&D본부 김병도 본부장은 "지난해 국내산 소고기 자급율은 36.4%로, 2014년(48.1%)보다 11.7%나 하락하는 등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마블링을 중시한 현행 등급제가 한우 브랜드 확립과 체계적인 품질관리에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소고기 맛의 기준을 획일화하고,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린 두 얼굴의 제도였던 셈이죠.
◇ 소고기 등급제만 개선하면 될까
정부 역시 한우의 가격 경쟁력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올 연말엔 소고기 등급제 개편이 예정돼있죠. 정부는 새 등급제 도입으로 육질등급 판정 시 마블링 기준을 완화, 우리 농가의 한우 사육 기간 단축을 통한 경영비 절감을 유도한다는 계획입니다.
하지만 한편에선 마블링으로 이름을 알린 한우의 브랜드 가치가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새 등급제가 수입 소고기에 맞서는 한우의 가격 경쟁력을 얼마나 키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마블링 중심의 소고기 등급제 자체에 의문을 가진 소비자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김 본부장은 "최근 건강과 '가성비'를 고려하는 소비성향 변화에 따라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지고 있다"며 "소고기 평가 항목을 다양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늘어났다"고 설명했습니다.
◇ 이제는 마블링을 다시 생각해볼 때
마블링을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인식이 바뀌면서 현행 소고기 등급제에 반기를 든 한우 농가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습니다. '풀로만 목장' 조영현 대표는 "축산업의 목적이 소를 더 빨리, 더 크게 키워 1++등급을 받는 것이다 보니 대부분 농가에서 소에게 곡물배합사료를 먹여 키운다"면서 "반면 우리 목장에서 풀만 먹여 키운 소는 지방 함량이 낮아 저등급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곡물 사료를 먹이지 않으면 소고기에 마블링이 적게 생기고, 현행 기준에선 높은 등급을 받고 비싸게 팔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조 대표는 오히려 "(풀만 먹여 키운 저등급 소고기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는 늘어났지만, 공급이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목장 운영 초기에는 두 달에 소 한 마리 팔기도 힘들었지만, 지난해 10월부턴 한 달에 한 마리씩 팔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조 대표는 이를 두고 "(저등급·저지방 한우를 찾는) 고객이 늘어나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한우 맛에 정답은 없습니다. 1++등급 한우는 고소해서 맛있고, 2·3등급 한우는 담백해서 맛있죠. 숫자로 줄 세우다 맛있는 한우라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