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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디폴트옵션 도입보다 더 중요한 것

  • 2019.07.05(금) 17:01

"주식투자를 투기했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는 일부 여론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내부 정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둘째 치고요. 금융투자업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미선 헌법재판관의 청문회로 뜨거웠던 지난 4월. 한 여당 국회의원이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과 만나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주식투자로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일반 국민 정서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을 쏟아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우리사회 내 주식투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뿌리가 깊다. 주식투자로 일확천금을 노리다 재산 대부분을 날렸다는 이야기는 어쩐지 낯이 익다. 증권회사 다니는 사위가 주식투자에 빠질 것 같아 결혼 허락이 못 미더웠다는 소식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퇴직연금을 주식에 투자해 수 십 년간 운용한다면? 퇴직연금은 개인연금과 국민연금만으로 노후생활을 영위하기 쉽지 않은 우리사회에서 노후생활을 지탱할 미래자금이다. 소중한 미래자산을 주식에 투자한다는 건 위험천만해 보일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2년 전 발표한 '퇴직연금 사업자 만족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 DC(확정기여)형 사용자 10명 중 4명이 원리금보장상품을 선택했다. 원금 손실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는 의미다. 사업장 규모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문제는 원리금보장상품의 경우 투자 위험요소를 극도로 낮춰 수익률이 1~2% 대에 형성된다는 점이다. 은행 예금금리를 취하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는 얘기다. 물가상승률이 더 오르면 자칫 손해 보는 장사가 될 수도 있다.

보다 높은 수익률을 원한다면 투자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근로자들은 자금 운용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입할 여유도 넉넉치 않다. 자금을 굴려 만족할 만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리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폴트옵션 도입이 거론되기 시작한 배경이다. 디폴트옵션이란 연금 가입자가 별도의 연금 운용지시를 내리지 않을 경우 사전에 설정한 투자 상품에 자동으로 가입되도록 설정하는 제도다. 더불어민주당이 의제를 설정하고 고용노동부가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디폴트옵션 운영을 위한 법 체제가 마련되면 자본시장에 대량의 자금이 유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산운용업계는 이를 사업 확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보다 높은 수익성을 추구할 수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기대됐다.

하지만 노동계가 운용에 대한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논의는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듯하다. 디폴트옵션 적격상품으로 한 펀드를 설정했다고 치자. 근로자가 운용지시를 내리지 않아 회사 측에서 이 펀드에 자금을 투입했는데 펀드 수익률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이다.

손실의 책임은 해당 운용사를 선택한 회사에 있는 것일까. 애초에 DC형을 선택한 근로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디폴트옵션 자체를 도입한 정부 탓일까. 아니면 운용에 실패한 운용사일까. 책임의 범위를 확정하기 어려운 만큼 면책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도 쉽지 않다.

국회에서는 의원 주도로 법안이 발의될 것이기 때문에 시기의 문제일 뿐 방향성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디폴트옵션 적정상품에 원리금보장상품이 포함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근로자의 기존 안정성 추구성향은 그대로 유지돼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하는 취지가 희석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장기투자를 하면 변동성이 줄어들고 자산배분 전략을 구사하면 예측 가능한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를 지켜보면 논쟁의 핵심은 운용 기술의 영역이 아니다. 금융투자업계와 일반 근로자 사이의 투자에 대한 인식의 괴리가 더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시간이 지나야만 해결되는 일일 수 있다"고 말했다. 투자 자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애초에 퇴직연금을 자본시장에서 굴리는 것 자체가 힘들 것이라는 얘기다. 자산운용업계는 지금도 정부와 국회 간 동향을 초조하게 살피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디폴트옵션이 도입되더라도 반쪽짜리에 그치는 것은 물론 도입 이전과 똑같은 고민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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