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는 영화의 단골 소재입니다. 분야를 불문하고 자기 위치에서 일가를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취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번 '머니&컬처'에서는 1980년대를 풍미한 일본의 유명 포르노 감독 일생을 다룬 코믹 영화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원제: 전라감독)'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무라니시 토오루라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해 제작됐습니다. 영화 자체가 독특한 웃음 코드를 가지고 있어 보는 내내 배꼽을 잡는 것은 물론 일본 경제가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1980년대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실적이 계속된다면 다음 달엔 해고될 각오까지 해야 할 거야"
한 상사가 주인공 무라니시(야마다 타카유키 분)의 형편없는 영업실적에 짜증을 냅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으니 사정을 봐달라는 말에 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렇다고 잡초 뽑듯 잘라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선배 한 명을 쫓아다니면서 요령을 익히라고 다그칠 뿐입니다.
무라니시는 영업 비책을 하나씩 배워나갑니다. 인위적인 웃음은 사라지고 화려한 말재간이 몸에 익으면서 실적도 상승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사내 입지가 탄탄해질 즈음 회사는 난데없이 횡령사건에 휘말립니다. 일자리 자체가 사라질 판국입니다.
설상가상 아내가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광경까지 목격합니다. 가정과 직장을 세상의 전부로 여겨왔던 터라 그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술집 생활을 전전긍긍하던 무라니시는 우연히 뒷골목 세계를 알게 되고 이를 계기로 포르노 시장에 뛰어듭니다.
발군의 영업 실력에 특유의 에로 감각으로 돌풍을 일으킨 무라니시. 기존 업자들의 방해 공작에 존폐 기로에 서기를 반복하다 희대의 걸작을 찍어 기존 판 자체를 뒤집겠노라 마음먹습니다. 신작은 미국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액션 포르노 대작.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1980년대 일본 기업들은 세계 경제를 휘어잡고 있었습니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약 17년간 일본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10%를 웃돌았습니다. 일본이 세계 제일이라는 의미의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umber one)'이라는 말이 횡행했습니다.
소니의 워크맨, 도요타의 자동차 등이 세계 곳곳에 보급되면서 1980년대 말 닛케이 지수는 4만 포인트 가까이 치솟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파로 미국의 여러 산업이 일본산 제품에 밀려 존폐의 위기에 처합니다.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입니다.
미국인 사이에서 반일감정이 싹트기 시작했고 일본산 제품을 부수는 퍼포먼스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죠. 영화 속 무라니시 촬영팀은 하와이에서 여러 차별을 받습니다. 현지 경찰은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 없다"며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양국 간 긴장은 1985년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 결과 그해 9월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선진 5개국 재정장관회의에서 달러화 절하를 유도하는 이른바 플라자 합의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엔화를 강세로 밀어붙여 일본 기업의 수출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마침 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으로 글로벌 경제가 뒤숭숭한데요. 미중 무역전쟁의 진짜 이유가 '제2의 플라자 합의'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만큼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과거 플라자 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가 뒤처지지 않자 미국 정부는 2년 뒤 통상법 301조를 꺼내 들었습니다. 일본산 PC TV 등에 100% 관세를 가하는 조치를 취한 겁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일본이 반도체 협정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은 막을 내렸고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과거 성장 시기를 살았던 일왕이 죽으면서 쇼와 시대가 막을 내렸고 헤이세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일본 경제는 저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수출 주도형에서 내수 주도형으로 체질 전환에 나섭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볼까요. 영화 말미에서 무라니시가 스타 감독으로 떠오르는 장면과 시대가 바뀌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 장면에서는 묘한 짜릿함마저 느껴집니다. 올해를 경계로 일본의 연호는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바뀌었는데요, 무라니시가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스타 반열에 오른 것처럼 앞으로 어떤 새로운 장면들이 연출될지 관심입니다.
영화는 '백엔의 사랑' '인더히어로' 등을 연출한 타케 마사하루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선정적 장면이 많지만, 영화 곳곳에 웃음을 자아내는 장치가 마련돼 있습니다. 영화 '곡성'에서 인상적 연기를 선보여 우리에게 꽤 익숙한 쿠니무라 준과 일본의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인 코유키 등이 출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