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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호황에 퇴직연금도 지각변동…'내가 직접 굴린다'

  • 2020.12.16(수) 14:23

DB형 줄고 DC형·IRP 늘어…증시호조에 제로금리·집값상승 여파
'수익률 우위' 증권사로 머니무브…펀드·ETF 활용 균형 투자해야

40대 초반의 직장인 강 모 씨는 최근 자신의 퇴직연금 운용 현황 보고서를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올 초만 해도 1%대에 불과했던 퇴직연금 수익률이 7%대를 훌쩍 넘은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강 씨는 안정적이지만 수익률이 높지 않은 확정급여(DB)형 대신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크지만 그만큼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확정기여(DC)형으로 퇴직연금을 굴려왔던 상황. 지난해까지 국내 주식시장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 탓에 DB형에 가입한 동료들보다 수익률이 낮아 남몰래 속앓이를 해왔지만 이제는 주변에 수익률을 공개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최근 코스피가 2700선을 돌파하는 등 국내 증시가 유례없는 호황을 보이면서 퇴직연금 시장에도 지각변동이 나타나고 있다. 그간 퇴직연금 시장을 주도하던 DB형이 주춤한 반면 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의 과열, 저금리 장기화와 맞물려 퇴직연금 시장의 무게중심이 서서히 DB형에서 DC형·IRP로, 은행·보험사에서 증권사로 조금씩 이동하는 게 아니냐는 견해가 나온다. 이에 따라 증권사들의 퇴직연금 유치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적립금, DB형 줄고 DC형 늘어…IRP 급성장세

16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3분기 기준 퇴직연금 DB형의 적립금은 136조668억원. 작년 말 138조245억원보다 1.4%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DC형 적립금은 56조7920억원에서 58조6782억원으로 3.3% 넘게 늘어났다. IRP 적립금 증가세는 이보다 더 두드러진다. 25조4000억원에서 31조387억원으로 22% 이상 급증했다.

퇴직연금은 크게 DB형과 DC형, IRP로 나뉜다. DB형은 가입자가 회사에 퇴직금 운용을 맡기고 기존 퇴직금처럼 근속기간 1년에 대해 30일치의 평균 임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형태다. 성격상 예·적금이나 보험상품 같은 원리금 보장형에 주로 투자한다. 수익률은 낮지만 퇴직금을 떼일 염려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대다수 직장인들이 DB형에 가입해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의 62.4%를 DB형이 차지하고 있다.

DC형은 가입자가 직접 퇴직금을 운용하는 형태다. 회사가 납부할 부담금은 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로 확정돼 있고, 회사는 퇴직연금 운용 계약을 맺은 퇴직연금 사업자에 개설한 가입자 계좌에 부담금을 넣어준다. 가입자는 본인이 책임을 지고 적립금을 운용한다. IRP는 가입자가 타 직장으로 이직할 때 그때까지의 적립금을 이전 받는 형태로, DC형과 마찬가지로 가입자 스스로 굴린다. 주로 펀드 상품에 투자한다. DC형과 IRP 모두 가입자가 잘 운용하면 DB형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지만 반대로 잘못하면 큰 손실을 볼 수도 있다.

결국 DB형 가입자가 줄고 DC형과 IRP 가입자가 늘고 있다는 것은 근로자들이 퇴직금을 좀 더 공격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투자업계에선 4분기에 이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증시 호조에 제로금리·집값 상승 여파 '복합 작용'

DB형 대신 DC형과 IRP로 가입자가 몰리는 배경은 복합적이다. 제로금리 시대를 맞아 예·적금 상품의 이자율이 1%에도 채 못 미치는 상황에서 국내 증시가 연일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자 근로자들이 증시 상승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DC형과 IRP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에 우선 힘이 실린다. 특히 최근 주식투자 열풍과 더불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장지수펀드(ETF)는 은행과 보험사 퇴직연금 상품에선 매매가 불가능하지만 증권사들의 DC형, IRP에서는 레버리지·인버스 ETF를 제외한 대부분의 ETF가 매매 가능해 젊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은행과 보험사의 DB형 대신 증권사의 DC형·IRP에 가입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아울러 부동산 시장의 과열 현상도 근로자들의 공격적인 퇴직연금 운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퇴직연금 전문 컨설턴트는 "직장인, 그중에서도 젊은 직장인들과 상담하다 보면 근래 집값이 너무 많이 올라 허탈해 하는 경우가 많다"며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퇴직연금에서라도 수익을 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퇴직연금이 보편화되면서 적립금 규모가 커지다 보니 이를 부담스러워하는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DC형이나 IRP로 제도를 변경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현행법상 실제 퇴직연금 유형 변경은 회사와 근로자 간 합의와 동의에 따라 이뤄질 수 있다. 한 자산운용사 퇴직연금 컨설팅 관계자는 "회사 입장에선 DB형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할 시 급여가 상승하는 만큼 수익을 내야 차후 퇴직금 부담이 적은데 막상 그러긴 쉽지 않다"며 "늘어나는 적립금에 부담을 느껴 DB형에서 DC형으로 바꾸거나 IRP를 도입하는 회사들도 적잖다"고 말했다. 

◇증권사 DC형·IRP가 수익률 우위…증권사 유치 경쟁 계속될 듯

실제 수익률에서도 원리금 비보장형 비중이 높은 DC형과 IRP가 DB형을 훨씬 앞선다. DB형의 주력 상품인 예·적금 상품의 금리가 워낙 낮은데다 최근 증시 랠리로 DC형과 IRP로 주로 투자하는 펀드와 ETF 상품들의 수익률이 눈에 띄게 좋아져서다. 

3분기 기준 43개 퇴직연금 사업자 가운데 DC형과 IRP 수익률 1위는 미래에셋대우다. DC형에서 4.80%, IRP에서 4.04%로 4%대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DB형 1위인 한국투자증권의 수익률 2.26%와의 격차가 상당하다. 그나마 한국투자증권은 원리금 비보장형 상품에서 5% 가까운 수익률로 전체 성과를 끌어올리며 은행과 보험사들의 DB형보다 나은 성적을 거뒀다.

수익률을 좇아 퇴직연금을 선택하는 젊은 직장인이 늘면서 은행·보험업권으로부터 증권업권으로 넘어오는 사례도 늘고 있다. 미래에셋대우의 경우 올 들어 3분기까지 자사로 넘어온 은행·보험사 연금저축과 IRP의 계좌 수와 금액이 총 1만3659개, 4967억원으로 지난해 전체 이전 계좌 수(7464개)와 금액(2484억원)보다 2배가량 증가했다. 

이승진 미래에셋대우 연금마케팅팀 선임매니저는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기 위해 증권사를 찾는 퇴직연금 가입자가 늘고 있다"며 "최근 증시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이들은 퇴직연금 포트폴리오에 코스피를 추종하는 ETF나 미국 대표지수를 따르는 ETF를 주로 담고 있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퇴직연금 사업을 하는 대형 증권사들을 중심으로 퇴직연금 가입자 유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미래에셋대우가 100억원 미만 구간의 DC형 수수료율을 0.3%에서 0.28%로 낮춘 것을 비롯해 신한금융투자도 DC형 수수료율을 0.4%에서 0.29~0.33%로 내렸다. 한국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 한화투자증권 등도 수수료 이벤트 등을 벌이며 가입자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인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과거 안정성에 주안점을 뒀던 퇴직연금 투자가 점차 수익성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증권사 DC형과 IRP를 선택하는 회사와 가입자가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은퇴 후 노후 대비를 위한 퇴직연금의 기본적 특성을 고려해 균형 잡힌 운용전략은 계속 가져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민주영 키움투자자산운용 퇴직연금컨설팅팀 이사는 "퇴직연금을 통해 투자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긍정적이나 시장 상황만 보고 단기적인 관점에서 상품을 선택하고 매매하다간 손실을 볼 가능성이 크다"며 "투자에 관심 있는 젊은 직장인이라면 포트폴리오의 50~60%는 안정적인 펀드로 채우고 나머지 30~40%는 ETF를 활용해 수익을 노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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