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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의 기후변화 캠페인

  • 2014.10.01(수) 08:31

예일대 학부를 수석 졸업하고 모건 스탠리에서 4년, 골드만 삭스에서 3년을 일하며 금융투자를 배운 한 젊은이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지난 1986년 캘리포니아에 투자 회사를 하나 차린다. 시작은 직원 2명, 초기 자산은 친척이 투자한 1500만달러(158억원). 헤지 펀드 회사로는 매우 작지만 이 회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익을 낸다는 의미로 '절대 수익'(absolute return)이라는 원칙을 표방하며 운영을 시작한다.

 

때로는 잃고, 때로는 따는 도박판 같은 성격이 강하고 거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주가 폭락 등 각종 사건이 발생하는 자본 시장에서 ‘절대 수익’이라는, 꿈 또는 사기같은 원칙을 표방한 이 젊은 창업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지난 2012년 직원은 200명, 총 운용자산 215억달러(22조원)로 성장한 헤지 펀드 회사의 CEO가 되었다. 운용자산 기준으로 규모가 1375배 성장한 것이다.

 

그가 지난 1986년부터 2006년까지 모든 고객에게 ‘절대 수익’을 안겨 주었는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이 회사는 무수한 전설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지난 1990년 초 예일대학교 연기금 3억달러를 위탁 받아 3년만에 6억달러로 만들어 돌려준 바 있다. 지난 1990년 1월부터 1997년 6월까지 단 한번도 손실을 기록하지 않은데다 위험조정수익률인 샤프비율(Sharpe Ratio)이 주식시장 전반의 샤프비율보다 무려 3.5배나 높아 연기금 관리 기관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절대 수익’ 을 낸다는 원칙이 허풍이 아니라고 인정해 줄만 하다. 이 전설적인 헤지 펀드 회사의 이름은 파랄론 캐피탈 (Farallon Capital). 젊은 창업자의 이름은 톰 스타이어(Tom Steyer)다.

▲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톰 스타이어는 투자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깜짝 놀란만한 사업 실적을 기록한 톰 스타이어 회장은 지난 2012년 10월 은퇴를 선언하며 다시 한번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이유가 더 놀랍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싶다는 것이 은퇴의 변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은퇴 이후 톰 스타이어가 자신의 시간은 물론, 은퇴 시점에서 2조2000억원에 달했던 개인자산을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스타이어 회장이 지난 2012년 갑작스럽게 기후-에너지 문제에 뛰어든 건 아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 분야에 있어 스타이어 회장은 이미 지난 2008년도에 스탠포드 대학에 '톰캣 지속가능 에너지 연구 센터(TomKat Center for Sustainable Energy)'를 설립하기 위해 4000만달러(422억원)을 지원한 바 있다. 센터 설립 취지는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원가 절감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정책 활성화, 좀 더 내구성이 있고 독성물질을 덜 사용한 배터리 개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력망에 연결 가능한 재생 전력원 한계 산정(태양광, 풍력발전소 연결 가능 규모)등 이었다.

 

그렇게 통 큰 기부지만 억만장자로서는 평범한 방식으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지원하던 스타이어 회장은 지난 2010년에 '기후변화 해결에 관한 법(the Global Warming Solutions Act of 2006)'의 시행을 연기시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프로 32(Prop 32)'라는 법안이 주민 투표에 부쳐지는 것을 계기로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한 반대 캠페인에 250만달러를 지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책 싸움에 나섰다.

 

특이한 점은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정치자금 후원자로 알려진 스타이어 회장이 공화당 출신인 죠지 숄츠 전 국무장관과 연합해서 '프로 32'를 반대했다는 점이다. 스타이어 전회장은 관련 캠페인에 총 500만달러(53억원)를 지원했고 주민 투표는 스타이어 회장이 원하던 대로 큰 격차로 ‘프로 32’ 통과 반대로 마무리 됐다.
 

▲ 민주당 지지자인 톰 스타이어(오른쪽)는 공화당 원로인 조지 숄츠 전 국무장관(왼쪽)과 함께 ‘프로 32’ 법안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지난 2010년 기후변화 대응법 방어에 성공한 스타이어 회장은 지난 2012년 캘리포니아 외부에 적을 두고 실제로는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하는 업자들이 세금을 면제받는 조항을 개정해 조세회피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인 '주민발의안 39호(Proposition 39)'를 후원하는데 앞장섰다. 법안이 통과되면 캘리포니아는 연간 10억달러의 세금을 더 걷어들일 수 있는데, 이렇게 늘어난 세금으로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개발을 지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스타이어 회장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며 법안 찬성 캠페인 초기에 2200만달러(232억원)을 지원했다. 여기에 더해 캠페인 막바지에 3000만달러(317억원)를 추가로 지원했다. ‘법안을 반대하려면 싸게 먹히는 방법을 찾는 건 불가능할 것입니다’라는 경고와 함께. 주민발의안 39호는 주민 과반 이상의 지지를 얻어 통과되었다. 또 한번 스타이어 회장의 승리였다.
 

▲주민발의안 39호 찬성 캠페인 광고. "39번 법안에 찬성해서 캘리포니아에서 깨끗한 에너지에 기반한 경제를 가꾸세요"라고 쓰여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위협이 점점 현실화 되면서 스타이어 전 회장은 기후변화 대응에 부정적인 지역에서 관련 정책을 반대해 온 정치인을 낙선 시키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낙선 운동은 스타이어 전 회장의 주도로 만들어진 ‘NextGEN Climate’ 이라는 단체가 여러 기부자의 후원금을 받아 낙선 광고 캠페인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스타이어 전 회장은 특히 기후변화 피해 지역이면서도 기후변화 문제 대응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플로리다에 집중하고 있다. 플로리다는 2000년도 선거에서 앨 고어 대신 조지 부시를 당선 시키는 역할을 했던 곳인 만큼 이 지역의 분위기를 바꿔 놓을 수 있다면 2016년 대선에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인 후보를 당선 시킬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다.
 
헤지 펀드를 운영해서 부를 축적한 억만장자가 정치 캠페인에 수백억을 투입하고 특정 정치인의 낙선 운동에 나서는 것을 두고 돈 많은 개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비난도 많다. 그렇지만 이미 석유재벌인 코크 형제(Koch Brothers)가 수십 년간 정치판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미쳐 기후변화 문제 대응을 심각하게 지연시키고 있는 상황이라 스타이어 전 회장 같은 공익적인 목적으로 정치 참여를 하는 사람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기후변화 대응에 부정적인 정보를 유포하는데 앞장 서는 폭스 뉴스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억만장자가 기후변화 이슈 관련 엄청난 돈을 모금을 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이라는 강력한 선진국이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국가가 된 데에는 코크 형제 같은 석유 재벌들의 입법 로비와 ‘과학자들이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있지도 않은 기후변화 라는 문제를 만들어 냈다’는 등 잘못된 정보의 의도적인 유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톰 스타이어 같은 억만장자의 출현은 힘의 균형을 맞추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좀 더 공익적인 방향으로 끌어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환하게 웃고 있지만 기후변화 문제 해결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코치 형제, 주로 석유 관련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으며 자산 규모로는 톰 스타이어 회장을 압도한다. 최근에 기후변화 대응 반대 캠페인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는 의혹이 현실로 밝혀졌다.


물론 이상적인 결과는 돈이 지배하는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개혁돼 돈이 많은 특정 개인이나 기업이 기후변화 대응 같은 중요한 문제 해결을 지연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변화가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환자가 너무 늦게 병원에 찾아가면 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이미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두 아이를 둔 아빠 입장에서, 네 아이의 아빠인 스타이어 전 회장이 앞으로도 계속 선전해 주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국내 기업들이 이런 정치적 동향을 세심하게 모니터링 해서 경영에 참고하기 바란다. 미국이 지금까지 기후변화 대응에 별 도움이 안 되는 행보를 보였지만 스타이어 전 회장 같은 사람의 행보를 보면 앞으로 변화가 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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