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하우스 푸어(house poor)는 없어요. 요즘은 대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위너고, 집 산 다음엔 전세로 돌리면 되니까요. 집값이 수억원씩 오르는데 대출 받았다고 어떻게 '푸어'(가난한 사람)겠어요."
한 부동산 전문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불과 3~4년 전만 해도 종종 들리던 '하우스 푸어'라는 단어가 언젠가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더라고요.
무리하게 대출 받아 집을 구매하느라 이자 부담으로 빈곤하게 사는 사람을 하우스 푸어라고 하는데요.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에 이어 2014년 내수 활성화 정책과 저금리가 맞닿으면서 조성된 '빚 내서 집 사라'는 시대에도 자주 등장했던 단어입니다.
불과 3년여 전만 해도 빚 내서 집 산 이들은 스스로를 하우스 푸어라고 자조하며 앓는 소리를 했었는데요. 지금은 어떨까요?
현 정권 들어 부동산 시장의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오히려 무주택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집값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대출 이자로 인한 손해보다 시세 차익을 통해 얻는 이익이 더 커졌기 때문이죠.
한국감정원 주간아파트 매매가격 시계열 자료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2017년 5월 10일)한 이후 지난해 말까지 2년 6개월여 동안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11.09%나 올랐습니다.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은 지난달 기준 7억9758만원으로 8억원(KB시세 기준으론 9억여원)에 달하고요.
여기에 같은 기간 경기도 과천(25.63%), 성남(18.60%), 분당(21.01%), 구리(18.69%) 등 서울과 인접하거나 교통 호재 등이 있는 수도권 일부 지역까지 집값이 동반 상승하면서 '하우스'와 '푸어'의 사이는 갈수록 멀어졌습니다.
물론 그들도 마냥 웃을 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정부가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사지 못하도록 시장을 전방위적으로 옥죘기 때문이죠. ▲투기지역 및 투기과열지구 지정(2017년 8‧2대책) ▲주택담보대출 시 DTI‧DSR 강화(2017년 10‧24대책) ▲규제지역 1주택 이상 대출 봉쇄(2018년 9‧13 대책)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 지정(2019년 11‧6대책) ▲종합부동산세 인상(2019년 12‧16대책) 등으로요.
집값이 불안하다 싶으면 대책을 추가로 내놓는 바람에 벌써 열여덟번의 부동산 대책이 나왔는데요. 두 달에 한 번꼴로 대책을 발표하며 시장을 압박하다 보니 서울 집값도 과열이 어느 정도 잡히는 모습입니다.
일각에선 혹시라도 집값이 떨어져 시세차익이 줄어들고 대출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져 다시 '푸어'해질 수 있는게 아니냐고 초조해하는데요. 하지만 이런 불안도 잠시. '전셋값'이 오르면서 금방 해소됐습니다.
통상 임대 계약은 2년에 한 번씩 갱신되는데, 2년 전 보다 매매가격이 올랐으니 전세 가격도 올려서 재계약하면 되거든요. 특히 정부가 12‧16대책을 통해 대출 규제를 한 층 더 강화했고, 분양가상한제까지 시행하면서 매매 수요가 전세 수요로 돌아서기도 했고요.
한국감정원 서울 주간 아파트 전세가격 변동률은 지난해 6월 17일 보합(0.0%)으로 전환한 뒤 7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27주째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울러 12월 9일엔 전주 대비 상승률이 0.14%였다가 12‧16대책 발표를 거쳐 12월 23일엔 0.23%까지 치솟았습니다. 12월 30일엔 다시 0.19%로 다소 떨어졌지만, 시장에선 앞으로도 전셋값 상승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12‧16대책으로 인한 풍선효과가 당분간 이어질테고, 전세 수요는 느는데 공급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죠. 이달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은 2446가구(직방 집계)로 전년 동월 대비 60%, 전월 대비 53%가량 쪼그라들어 공급 감소로 인한 전셋값 상승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우스푸어'는 점점 옛말이 되는 듯 합니다.
주택산업연구원은 올해도 서울 집값 상승률이 전년 대비 1.0%(아파트는 1.2%)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는데요. 집이 있는 사람은 시세 차익을 통해 더 큰 부자가 되고, 무주택자는 치솟는 집값(매매‧전세)을 감당하지 못하고 대출 부담만 점점 커지는 양극화가 심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는 어김없이 '더 강력한 규제'로 시장에 엄포를 놓은 상태입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전세가격 과열 등을 짚으며 "부동산 시장과 관련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추가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요.
정부의 이런 '두더지 잡기식 대책'이 오히려 집값 상승을 일으켜 주택 매수 수요를 확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때마다 오히려 집값이 더 오르다 보니 이제 시장에선 서울 집값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학습효과와 기대감이 조성된지 오래"라며 "부동산 튤립버블(경제현상에서 거품이 발생한 상황)이 버블이 아닌 사실이 돼 버렸다"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서울이나 수도권에 집 한 채만 가져도 부자가 되는 시대"라며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집 사서 돈 버는 시대'의 막을 내리고 실수요자들의 내집 마련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선 정부가 좀 더 신중하게 주택 정책에 접근해야 할 때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