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안전진단 규제 완화'가 목전이다. 고금리, 경기 침체 등이 맞물려 주택 공급 위축 우려가 커지자 윤석열 대통령이 '정비사업 절차 원점 재검토'를 재차 언급한 데 따른 것이다.
재건축 첫 관문인 안전진단 문턱이 낮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를 통해 도심 주택 공급 역시 속도가 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다만 공사비 인상,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등 시장 환경이 척박해진 탓에 안전진단 완화 만으론 공급 확대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란 예상도 있다.
안전진단 '패스'…1~2년 단축 가능
국토교통부는 이달 중 도심 내 원활한 주택 공급을 위해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 규제 완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금리 인상, 매수 심리 저하 등으로 주택 공급 위축이 우려된 데 따른 조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앞으로는 재개발·재건축 착수 기준을 노후성으로 완전히 바꾸겠다"며 "사업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도록 사업 절차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2일 신년사에서도 "새해에는 국민들이 새집을 찾아 도시 외곽으로 나가지 않도록 도시 내에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며 "재개발·재건축 사업 절차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사업 속도를 높이고 1~2인 가구에 맞는 소형 주택도 확대하겠다"고 재차 예고했다.
국토교통부 안팎에서는 이번 규제 완화의 핵심이 '재건축 안전진단 완화'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 아파트 등 공동주택을 재건축하려면 준공 후 30년이 지나고 안전진단에서 'D등급' 이하를 받아야 한다. 안전진단이 재건축의 첫 관문인 셈이다.
그러나 이 조건이 까다로워 첫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사업이 좌초된 단지들이 꽤 있다. 재건축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하면 리모델링으로 사업 방식을 바꾸거나 조건을 충족할 때까지 수년~수십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정부는 작년 초에도 안전진단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 그러면서 다시 노후단지 중심으로 재건축 추진에 탄력이 붙었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호소하는 단지들도 많다. 현재는 안전진단을 통과한 후 재건축 추진위원회나 조합을 설립하게 돼 있다. 사업 주체가 만들어지지 않은 채 안전진단을 진행해야 하는 게 문제다.
통상 주민들이 재건축추진준비위원회 등을 만들어 비용을 모으는데, 이 단계에서 모금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거나 모임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전진단까지도 가지 못한다. 정부는 이 순서를 바꿔 사업 주체를 먼저 설립하게 한 뒤 안전진단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건축 안전진단은 예비안전진단, 1차 정밀안전진단, 2차 정밀안전진단 순으로 진행된다. 소유주가 비용을 부담해 추진해야 하는 정밀안전진단의 경우 단지별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통상 1차는 3~6개월, 2차는 6개월 이상 소요된다. 사업 가능성을 판정하는 데만 최소 1~2년 걸리는 셈이다.
정부는 준공 후 30년이 넘은 노후 아파트는 안전진단을 생략하고 바로 재건축 절차에 착수하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 사업이 1~2년 단축될 수 있다.
재개발의 경우 조합 설립 인가 주민 동의율(현행 75% 이상)을 낮추고 자금 조달 비용을 줄여주는 식의 방안이 거론된다. 최근 PF 불안 등 경기 악화로 자금 조달 금리가 인상돼, 비용 부담을 겪는 일부 구역에 대해 정책금융기관이 신용 보증을 제공해 비용을 낮춰주겠다는 구상이다. 정비사업 추진 확 는다? "글쎄…"
이 같은 규제 완화 방안이 적용되면 도심 정비사업 추진에 가속이 붙을 전망이다. 특히 입지가 좋아 사업성은 인정받지만 안전에는 문제가 적어 진척이 어려웠던 단지들 위주로 꿈틀댈 것으로 보인다.
서진형 한국부동산경영학회 회장(경인여대 교수)는 "주거환경 악화 등으로 재건축이 불가피하거나 자금 여력이 있어서 주거 수준을 높이려고 하는 단지들 위주로 사업에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국토부가 지난해 1월부터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대폭 완화하자 재건축 추진 단지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구조안전성 비중을 기존 50%에서 30%로 낮추고 주거 환경은 15%에서 30%로 상향 조정한 게 이때 변화였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 5년간 65건에 그쳤던 안전진단 통과 단지는 윤석열 정부 들어 160건을 넘어섰다. 여기에 준공 30년 이상 노후주택 안전진단 면제 등 규제 완화의 폭이 더 커지면 추진 단지는 더 많아질 개연성이 있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이달 2일 조사 기준 수도권에서 준공 31년을 넘은 아파트는 총 103만1661가구로 전체(602만4786가구)의 17.1%에 달한다.
특히 서울은 준공 31년 이상 아파트가 46만3731가구다. 전체(182만6886가구)의 25.4%를 차지한다. 규제 완화가 적용되면 4채 중 1채는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 시작부터 속도를 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공사비 인상, 부동산 PF 부실 우려 등 공급 저해 요인에 가로막혀 당장 공급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이미 건설사들은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을 감안해 사업장별로 '옥석 가리기'에 나선 상태다. 부동산 상승기 때는 '출혈 수주'도 마다하지 않던 시공사들이 최근엔 섣불리 입찰에 뛰어들지 않는 분위기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시장상황이 좋지 않아서 자본 여력 등 공급자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며 "공사비나 추가적인 분담 여력이 개선되지 않는 한 안전진단 규제 완화만으로 공급 활성화가 이뤄지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비업계에선 원활한 주택 공급을 위해선 용적률 상향, 기부채납 완화, 분양가상한제 폐지,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완화 등 추가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만 무분별하게 규제를 풀었다간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 역시 있다.
윤수민 NH농협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규제 완화에는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시장의 어느 단면만 보고 풀면 역차별, 형평성 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시장 변동성도 키울 수 있다"고 짚었다.
이어 "지금은 공급 위축이 우려돼 규제를 전면 완화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과잉 공급 우려가 나오는 등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수위조절이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