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가 개원한 지 꼬박 석 달이 지났다. 국민과 기업의 세금 문제를 바꾸는 세법 개정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과반수가 재탕이다. 18대 국회나 19대 국회에서 폐기된 법안을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개월간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된 세법 130건 가운데, 과거에 나왔던 법안을 세어보니 74건에 달했다. 세법 개정안의 57%가 이미 한번씩 나왔던 내용들이란 얘기다. 주로 20대 국회에서 낙선한 의원으로부터 물려받거나 현역 의원이 과거 추진하던 법안을 다시 내놨고, 다른 정당 의원의 과거 법안을 먼저 제출한 경우도 있었다.
▲ 그래픽/김용민 기자 kym5380@ |
세금을 깎아주는 법만 모아놓은 조세특례제한법만 떼놓고 보면 베끼기는 더욱 심각하다. 조특법 55건 가운데 재탕 법안은 32건, 일몰 기한을 연장하는 법안은 12건이다. 기존 세법에서 일몰 기한을 몇 년 더 연장하자는 문구만 고치면 세법 한 건이 뚝딱 나온다.
똑같은 법안을 여러 의원들이 중복 발의하는 비효율도 심각하다. 국세청이 걷는 부가가치세의 일부를 지방자치단체에 더 나눠주자는 지방소비세 조정 법안은 4명의 의원이 제출했다. 주로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구 의원들이 배분 비율만 바꿔서 내놨다. 법안을 낸 의원들은 지자체나 유권자들에게 재정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는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 이 법안은 19대 국회에서도 10명의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올해 종료하는 신용카드 사용금액에 대한 소득공제 기한을 연장하는 법안도 4건이 제출됐다. 연장하려는 기한만 각각 3년, 4년, 5년으로 바꿔서 중복을 피했고, 아예 일몰 기한을 폐지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정부도 신용카드 공제 일몰 연장 법안을 9월 중에 제출할 예정이다. 결국 11월 정기국회에서 기획재정위원회는 사실상 똑같은 내용의 법안 5건을 놓고 심사하게 된다. 어차피 병합 심사할 텐데 유사한 법안을 계속 제출하는 것은 엄연한 과잉 입법이다.
그럼에도 국회의원들이 법안 대표발의에 집착하는 이유는 홍보 효과와 입법수당 때문이다. 법안이 제출될 때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고, 유권자들에게 의정실적을 홍보하기도 좋다. 입법에 대한 수당도 따로 나오니까 법안을 많이 만들수록 부수입도 쏠쏠하게 생긴다.
이런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동료 의원들끼리 품앗이하듯 발의 도장을 찍어주니까 법안 제출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숫자만 살짝 바꾸거나 내용이 부실한 법안이라도 의리로 극복할 수 있다. A의원이 베끼면 B의원도 따라 하는 컨닝의 전염 현상이 20대 국회에서 더욱 만연해진 모습이다.
재활용 법안이 늘어날수록 그 피해는 납세자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과거에 폐기된 법안을 살펴보면 대부분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거나 입법 논리 자체가 부족했다. 그런 법안들이 20대 국회에 제출되더라도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기저기 공수표만 돌아다니는 셈이다.
새로 나온 법안 중에도 납세자의 세금 문제를 속 시원하게 개선해줄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선심성으로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다가 형평성 논란만 부추기기도 한다. 아파트 관리비나 휴대폰 요금에 소득공제를 적용하자는 법안은 수백만명의 직장인을 위한 내용이지만, 오히려 주거 형태나 직업에 따른 소외 계층의 반발을 샀다. 서민보다는 고소득자에게 감세 혜택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실적과 생색 내기에 급급한 입법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조세 입법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고, 양질의 세법을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입법의 초기 관문인 국회 입법조사처와 전문위원실도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무엇보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과 정부가 세법을 만들 때 납세자를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다.
☞ 이 기사는 한국세무사회가 발간하는 세무사신문 2016년 9월1일자 683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