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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끗]②'용띠' 오징어땅콩, 용(龍)된 사연

  • 2021.12.08(수) 14:00

한국인 '취향 저격'해 제품 기획
맛·형태 차별화로 경쟁력 확보
2000년대 들어 '젊은 이미지' 전환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서 사랑받고 있는 많은 제품들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한 끗 차이가 제품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에 숨겨져 있는 그 한 끗을 알아봤습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함께 찾아보시죠. [편집자]

제과 시장에는 '이무기'가 많습니다. 매년 수많은 신제품들이 '용(龍)'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혁신적인 제품들도 제법 많습니다. 이무기가 천 년 동안 물 속에서 수행하듯 오랫동안 개발된 제품도 눈에 띄고요. 하지만 대부분이 출시 초반 반짝 인기를 끈 후 사라지곤 합니다. 사람들의 입맛이 빠르게 바뀌고,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이 많아서입니다.

그래서 오징어땅콩은 더 특별합니다. 오징어땅콩은 4년간의 수련을 거쳐 1976년 '용띠' 해에 태어났습니다. 이후로는 아시다시피 말 그대로 제과 시장의 용이 됐습니다. 성장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 178억원이었던 연매출은 10년 뒤 300억원이 됐습니다. 지난해에는 500억원을 넘겼죠. 제과업계에서 대박의 기준은 연매출 120억원입니다. 오징어땅콩이 내 온 성과가 '넘사벽'인 이유입니다.

춘추전국 돌파한 '이름의 힘'과 '기술'

오징어땅콩은 어떻게 용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징어땅콩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한 번 짚어보겠습니다. 국내 최초의 양산 과자는 1945년 해태가 출시한 '연양갱'입니다. 해태는 이듬해 최초의 국산 사탕인 '해태캬라멜'도 내놓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국내 과자 시장에는 이렇다 할 '브랜드'가 없었습니다. 다양한 제조사가 비슷한 '시장 과자'를 내놓는 구조였죠. 오리온의 전신인 동양제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황은 1970년대부터 바뀝니다. 경제개발 5개년 1차 계획이 완료되자 국민 생활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자연스럽게 간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과자 붐'이 일었죠. 선두주자는 롯데(현 농심)였습니다. 1971년 롯데가 선보인 '새우깡'은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많은 기업들이 '브랜드의 힘'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새우깡은 또 다른 화두도 던집니다. '성분'을 제품명에 내세우는 '각인 효과'입니다.

/그래픽=김용민 기자 kym5380@

브랜드 과자 시장에서는 후발주자였던 오리온은 새우깡의 네이밍 전략에 주목합니다. 새롭게 개발 중이었던 제품명에 이를 그대로 도입하죠. 초코파이와 오징어땅콩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이 두 제품은 출시 전까지 국내에 비슷한 제품이 없었던 '완전한 신제품'이었습니니다. 때문에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직관적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상품의 특징을 오롯이 담은 이름은 이 두 브랜드의 '연착륙'을 이끌게 됩니다.

물론 성공 비결이 이름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리온은 오징어땅콩 개발에 4년을 투자했습니다. 사내에 '맛튀김 개발팀'과 '오징어 스낵 개발팀'을 신설해 전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맛튀김 개발팀은 신제품을 출시에 실패하면서 해체됩니다. 반면 오징어 스낵 개발팀은 땅콩 위에 반죽을 두른 후 구워내는 '이중구조' 개발에 성공합니다. 오리온은 이를 통해 오징어땅콩에 새로운 식감과 형태을 담아냈습니다.

'근본'이 만든 '대박'

오징어땅콩의 초반 성공에는 광고도 한 몫을 했습니다. 특히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한 TV를 활용한 광고가 대히트를 칩니다. 오리온은 이덕화 씨를 첫 모델로 기용합니다. 지금은 근엄한 '왕'의 이미지인 이덕화 씨는 당시까지만 해도 신인급 하이틴 스타였죠. 높은 품질의 제품에, 화려한 마케팅까지 펼쳐졌으니 성공은 당연했습니다. 오징어땅콩은 1980년 오리온 총 매출의 14.7%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으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오징어땅콩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식품 시장에는 단기 히트작, 이른바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가 많습니다. 오징어땅콩의 성공 비결은 제품 그 자체에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형태로, 시장의 니즈를 완벽히 파악해 만들어낸 제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오징어땅콩은 출시 당시 콘셉트부터 국내 시장에 최적화된 제품이었습니다.

오징어에 대한 내용을 담은 문종 실록(좌)과 땅콩에 대한 내용을 담은 1966년 매일경제 기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한국인의 수산물 사랑은 오래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수산 시장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오징어는 한국, 중국, 일본의 '소울 수산물'이었습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징어를 진상품으로 원할 정도였으니까요. 조선 말기부터는 울릉도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며 서민층에도 오징어가 널리 퍼집니다. 근현대 들어 맥주와 말린 오징어의 맛이 '찰떡궁합'임이 발견되면서 최고의 술안주로 자리잡습니다.

땅콩은 근현대 시기부터 각광받기 시작합니다. 1930년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예전에는 부럼으로 밤·호두를 까먹었지만 근래에는 낙화생(땅콩)을 많이 먹는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1970년대 이전까지는 '별미'였습니다. 출하 시기에 따라 가격 변동이 심해 주로 어른들의 술안주로 소비됐죠. 오징어땅콩은 이 둘을 합친 제품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지극히 익숙한 맛의 조합입니다. '근본'이 만든 '대박'인 셈입니다.

반백살 오징어땅콩, '젊은 제품'이 되다

오징어땅콩은 1990년대 들어 새로운 도전에 나섭니다. 경제 상황이 급격히 좋아지면서 프리미엄 과자 시장이 먼저 흔들립니다. 높은 품질과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보유한 외국산 제품이 범람하죠. 2000년대 들어서는 제조 공정이 발전하며 기성 브랜드의 '미투 제품'도 쏟아집니다. 이 탓에 술집에서 '짝퉁' 오징어땅콩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오리온은 오징어땅콩의 포지션을 '일상 스낵'으로 전환합니다..

오리온은 2004년 배우 이동건 씨를 새 광고 모델로 내보냅니다. 당시 이 씨는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고는 '심심 프리(Free)'를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심심풀이' 오징어땅콩에 '자유'를 보탰습니다. '윙크'를 하거나 '돼지코'를 닮은 무늬로 유머러스함도 살렸습니다. 오리온은 이 광고로 오징어땅콩의 이미지를 맥주 안주 혹은 고속도로 과자였던 것에서 젊고 친숙하게 바꿔냅니다.

오징어땅콩의 '장수'에는 시의적절한 '광고'도 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사진=오리온

'정통성' 강조 작업도 이어졌습니다. 오리온은 2006년 '30년 진품' 광고를 선보입니다. 이에 발맞춰 패키지도 리뉴얼했습니다. 당시 오리온은 패키지에 'Since 1976'이라는 글자를 넣어 역사를 강조했습니다. 후면에는 제조 공정을 삽입해 '차별화된 기술력'을 어필했죠. 디자인도 바뀝니다. 전면에 바다를 연상시키는 파도 이미지와 오징어를 큼직하게 넣어 소비자들에게 '원조'가 누구인지 각인시켰습니다. 이런 마케팅을 통해 오징어땅콩은 정통성을 지켜냅니다.

이렇게 오징어땅콩은 반백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화려하게 등장해 친근하게 자리잡았고 지금까지도 맥주를 마시거나 축구 경기를 볼 때 즐겨 먹는 스낵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제품이 됐죠. 아마 우리 아이들 역시 오징어땅콩을 접하며 자라날 겁니다. 덕분에 똑같은 제품을 사이에 두고 '공감'을 쌓을 수 있게 되겠죠. 다음 [결정적 한끗]에서는 이 오징어땅콩 맛의 비밀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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