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저녁. 태국 방콕 시내에 위치한 대형마트인 '빌라 마켓'의 한 라면 코너. 한국 라면 제품들로 가득 찬 한 진열대 앞에서 친구 사이인 사샤(Sasha)와 네이(Nae)가 여러 봉지 라면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고민하고 있었다.
각각 25세, 26세인 이 태국 여성들은 한국인 친구에게 삼겹살, 비빔밥, 라면과 같은 한식을 자주 추천받는다고 했다. 사샤는 매운 음식을 좋아해 한국 라면도 좋아한다. 그는 "'너구리'와 '안성탕면'을 제일 좋아한다"며 "한국 라면을 너무 많이 먹어서 엄마가 이제 그만 먹으라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네이는 좀 더 부드러운 맛의 볶음면을 즐긴다. 이날 네이는 여러 고민 끝에 평소에 즐겨 먹던 '짜파게티'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방콕에서 이런 광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어느 마트를 가더라도 쉽게 한국 라면 제품을 만날 수 있다. 농심을 비롯한 한국 라면 기업들이 오랜 시간 동남아 시장에 공을 들여온 결과다. 농심은 현재 방콕에서 진행 중인 아시아 최대 식품 박람회 '타이펙스 아누가 2026'에도 단독 부스를 마련해 동남아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타이펙스 개막일인 지난 26일 농심 부스에서 심규철 농심 글로벌마케팅부문장을 만나 농심의 동남아 전략과 신라면이 걸어온 글로벌 여정에 대해 들어봤다.
동남아 일상 속으로
농심은 올해 '타이펙스 아누가'에 국내 식품 기업 중 가장 큰 규모의 단독 부스를 마련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각국의 바이어와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부스를 찾았다. '한강 라면 조리대'를 설치해 라면을 끓여 주는 곳에는 긴 줄이 늘어설 정도였다.
농심이 이번 박람회에서 집중적으로 내세우는 제품은 '신라면 툼바'와 '신라면 김치볶음면' 같은 볶음면이다. 심 부문장은 "적도 부근에 위치한 동남아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국물이 있는 면 문화가 덜 발달한 편"이라며 "무더운 날씨 탓에 뜨거운 국물보다는 볶음면을 선호하는 식문화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농심이 타이펙스에서 신라면 툼바와 신라면 김치볶음면을 내세운 이유다.
이곳에서는 라면을 즐기는 방식도 한국과 다소 다르다. 농심의 동남아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김준태 농심 아시아영업본부장 역시 "한국은 120g 가량의 라면으로 한 끼 식사를 하는 것과 달리 태국에서는 60~80g 소용량의 볶음면을 간식처럼 즐기는 문화가 있다"고 소개했다.
농심은 이런 시장 특성을 반영하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글로컬 전략'으로 동남아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태국 미슐랭 셰프 쩨파이(Jay Fai)와 협업해 현지 향신료를 가미한 '신라면 똠얌'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신라면의 매운맛은 그대로 살리되 태국 식문화와 융합한 제품으로 인기가 높다. 김 본부장은 "제품의 용량도 한국과 동일한 120g 수준을 유지하며 한국적인 맛과 문화를 그대로 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농심이 동남아 시장에 공을 들이는 것은 성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심 부문장은 "동남아는 원래 면식 문화가 있어 라면에 친숙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 역시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전반에서 농심 라면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며 "코로나19 이후로는 수요가 워낙 많아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라고 밝혔다.
동남아에서는 태국의 '마마', 인도네시아의 '인도미' 같은 현지 브랜드와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심 부문장은 "로컬 회사들의 시장 점유율을 뺏어오는 것이 아니라 현지 소비자들에게 신라면이 일상적인 선택지가 되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식문화'
동남아에서 한국 라면의 인기가 높은 것은 제품 자체의 뛰어난 맛뿐 아니라 한국의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영향도 크다. 이는 동남아만의 현상이 아니다. 심 부문장은 "한국 문화가 일시적 트렌드를 넘어 전 세계에서 문화로 뿌리내리고 있다"며 "그 흐름 속에서 K라면이라는 고유한 카테고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농심은 그 기반을 일찍부터 닦아왔다. 농심은 라면을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한국 식문화' 그 자체라고 본다. 심 부문장은 올해 출시 40주년을 맞은 신라면의 뿌리도 한국의 전통 식문화에서 찾는다. 그는 "한국의 전통 식문화는 국·탕·찌개로 이어지는 습식(濕食) 문화"라며 "습식을 대표하는 것이 소고기 국물 맛이고 그걸 그대로 라면으로 옮겨 놓은 게 신라면"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맛만 한국식인 것은 아니다. 신라면은 출시 이후 40년간 한국인의 일상 속에 스며들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가 됐다. 신라면은 우리가 군대에서 보초 교대를 기다리며, 학원 버스가 오기 전 잠깐 들른 편의점에서, 하교 후 분식점에서 친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 때 늘 곁에 있던 음식이다.
외국인들 역시 라면을 통해 이런 정서적인 체험을 원한다. 농심이 페루, 일본, 베트남, 미국 등 전 세계 주요 랜드마크에서 '신라면 분식'을 운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 부문장은 "분식점은 학교 밖에서 친구들과 고민과 장래를 허물없이 나눌 수 있던 공간"이라며 "그 정서적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신라면 분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타이펙스의 부스도 신라면 분식 콘셉트로 마련됐다. 농심은 이곳에 농심은 한강 라면 조리대를 설치해 방문객들에게 직접 끓인 라면을 제공하고 있다.
심 부문장은 "해외에서 한국을 찾은 사람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경험 중 하나가 한강에서 라면을 먹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드라마와 예능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장면이 외국인들에게는 한국 문화를 경험하는 상징이 됐다는 설명이다. 라면이 곧 한국의 문화가 됐다는 의미다.
세계인의 소울푸드로
이렇게 라면을 해외에 알린 건 최근 인기를 끄는 K팝, K드라마 등의 K콘텐츠만이 아니다. 오랜 시간 라면이 한국인과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로 스며든 결과다. 심 부문장은 "한국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도, 융프라우와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서도, 배를 타고 먼 바다로 일하러 가서도 한국의 맛을 잊지 못해 찾던 것이 신라면이었다"며 "그렇게 한국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신라면이 함께 퍼져나갔다"고 말했다.
그 뒤에는 농심의 오랜 고집도 있었다. 농심은 라면을 해외에 처음 수출할 때부터 '라면(Ramyun)'이라는 한국식 표기를 고집해 왔다. 일본 기업들이 '라멘(Ramen)'으로 세계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도 이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심 부문장은 "처음에는 라면이 '한국에서 만드는 꼬불꼬불한 면'이라고 한 번 더 설명해야 했고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면서 "50년 이상 해온 노력이 이제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농심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협업 역시 농심의 이런 사명감에서부터 시작됐다. 심 부문장은 이 '케데헌' 마케팅을 직접 이끌었다. 협업의 시작은 케대헌이 '대박' 날 것을 예상하고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작품 속에서 '라면'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직원이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심 부문장은 "'라면'이라는 용어를 쓰는 회사는 우리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했다. 농심은 케데헌이 공개된 직후인 7월에 협업을 결정, 한 달여 만에 케데헌 패키지를 출시하면서 전 세계에서 케데헌과 마케팅 협약을 맺은 최초의 기업이 됐다.
심 부문장은 10년 후 50살이 된 신라면의 모습에 대해 '세계인의 소울푸드'가 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에게 신라면이 삶의 순간순간을 함께한 음식이듯 전 세계인에게도 그런 음식이 되길 바란다는 의미다. 농심이 내세운 글로벌 슬로건 'Spicy Happiness In Noodles'도 이 철학을 담고 있다. 단순히 매운맛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이 주는 행복한 순간을 전 세계와 나누겠다는 뜻이다.
라면으로 시작한 농심의 이런 여정은 다른 식품 분야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심은 라면과 함께 회사를 대표하는 '스낵' 사업의 세계화도 추진 중이다. 최근 방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필수 기념품으로 자리 잡은 스낵 '빵부장'은 스낵 글로벌화의 첨병 역할을 맡았다. 건강기능식품 '라이필'도 K뷰티 열풍과 함께 중국 등 주변 국가로 수출을 늘리고 있다.
심 부문장은 "농심은 단순히 라면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문화를 만드는 기업이 되고 싶다"며 "신라면이 전 세계인의 일상에 스며들어 그들의 소울푸드가 되는 날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