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거래소 파생상품시장본부장(부이사장) 자리에 금융감독원 출신이 잇따라 내정되면서 거래소 내부 반발이 거세다. 특히 내정자가 파생상품시장에 대한 경력이 전무한 은행감독 출신이라는 점에서 거래소가 공들이고 있는 글로벌 파생상품시장 경쟁력 제고에 역행하는 인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2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지난 주말 한국거래소에 한구 전 금감원 중소금융 부원장보를 파생상품시장본부장으로 추천했다. 지난 2월 12일 임기가 끝난 이경식 파생상품시장본부장의 후임이다.
한국거래소 파생상품시장본부장 선임은 독립된 금융기관의 내부 인사이지만 최근 수년간 금융감독당국의 입김이 작용해 왔다.
이경식 본부장 역시 금감원 부원장보 출신으로 지난 2023년 2월에 발탁됐고, 그 전임인 조효제 전 본부장도 금감원 부원장보로 퇴직한 후 2019년 10월 거래소 파생상품시장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생상품시장본부장 자리에 거래소 내부 승진 인사가 올라간 경우는 그 이전인 2016년 정창희 전 본부장이 마지막이다.
금감원 퇴직자 고정석이 됐다
한국거래소 상임이사이자 부이사장급인 파생상품시장본부장은 정관에 따라 이사장의 추천만으로 주주총회를 통해 선임한다.
이사장과 상임감사위원, 사외이사는 9명으로 구성된 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지만, 3명의 부이사장(경영지원본부장, 유가증권시장본부장, 파생상품시장본부장)은 이사장 단독 추천으로 선임한다.
사실상 이사장의 직권으로 선임할 수 있는 자리다보니 거래소의 감독권을 쥐고 있는 금융당국 인사의 '낙하산' 발탁이 손쉽게 이뤄진다는 평가다. 정은보 거래소 이사장도 직전에 금융위 부위원장과 금감원장을 거친 외부인사여서 당국 인사를 배척하기도 쉽지 않은 구조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금감원은 취업제한을 적용받는 기관이고, 고위직들의 퇴직 후 자리마련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며 "거래소 외에 은행, 금융지주나 다른 금융권도 마찬가지지만 감독당국인 금감원 출신의 임원자리 요구를 막기는 쉽지 않고, 이미 관례가 된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금감원은 공직유관단체로 4급 이상의 임직원은 퇴직 후 3년 간 유관기관 재취업이 금지돼 있으며, 재취업을 하려면 취업심사를 거쳐야만 한다. 이에 따라 단기간 비유관 업무를 하다가 은행이나 금융지주, 한국거래소 등에 재취업하는 금감원 출신이 적지 않다.문제는 전문성, "파생상품 실무는 아시오?!"
하지만 금감원 재취업 금지규정이 이들 인사를 임원으로 받아야 하는 유관기관에는 더 큰 독이 되기도 한다. 유관업무가 아니면 재취업이 가능해지다보니 역으로 전문성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파생상품시장본부장으로 거론되는 한구 전 금감원 부원장보 역시 파생상품과 관련한 경력이 전무한 상황이어서 단지 낙하산 인사라는 문제보다는 전문성 측면에서의 내부반발과 우려가 더 크다.
한 전 부원장보는 금감원 공채 출신으로 이복현 전임 금감원장 취임 직후 비서실장으로 승진 발탁됐다. 이후 은행검사2국장을 거쳐 임원(중소금융 부원장보)까지 올랐다. 전임 원장시절 두번의 승진을 경험했으나, 이재명 정부 들어 이찬진 금감원장이 취임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년 만에 임원자리에서 물러났다. 금감원 재직시절 은행감독 분야에서 20여년의 경력을 갖고 있지만, 파생상품본부장 업무와 직접 연결되는 보직 경험을 찾기 어렵다.
한국거래소 노동조합 관계자는 "거래소 내부에도 30년간 파생상품업무만 한 전문가들이 많지만, 외부에서 발탁하더라도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에서 하이 프리퀀시 트레이딩이나 현·선물 차익거래 등을 두루 경험한 능력있는 사람이 와야지, 20년 동안 은행감독만 하던 사람을 파생상품시장 지휘자로 앉힌다는 것은 시장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거래소 노조는 지난 17일부터 거래소 로비에 현수막과 구조물들을 설치하고 금감원 출신의 파생상품시장본부장 내정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노조는 특히 하루 거래대금만 100조원이 넘는 국내 유일의 파생상품시장이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수장 역시 시장의 눈높이에 부합하는 전문성과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글로벌 파생상품시장의 경우 리더들 대부분이 파생상품분야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다. 북미 최대 파생상품거래소인 CME그룹의 테런스 더피 회장은 CME의 현장 실무 최하위 직무인 러너부터 시작해 파생상품 외길을 걸어 회장에 올랐다. 시카고옵션거래소의 크레이그 도너휴 CEO 역시 20년 이상 파생상품 청산기관 경력을 갖고 있다. 독일 파생상품거래소 Eurex 등 유럽파생상품 거래소 수장들 역시 청산, 리스크관리, 파생상품 인프라분야 업무 전문가다.
이번 인사 문제는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기조에 따라 최근 파생상품시장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려는 한국거래소의 움직임과도 배치된다.
올해로 파생상품시장 출범 30주년을 맞는 한국거래소는 한국물 파생상품의 거래시간 전면 확대 등 해외 투자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는 자체 야간시장을 개장했고, 올해 들어 정은보 이사장이 직접 뉴욕과 유럽 거래소를 오가며 파생상품 거래시간 확대 체결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팔성의 추억...몸 사리는 거래소
거래소 노조가 금감원 낙하산 인사에 반발하고 있지만, 거래소 차원에서 이번 인사를 무력화하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금감원이 한국거래소에 대한 검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감원은 금융위의 위탁을 받아 한국거래소 검사를 실시할 수 있다. 앞서 2011년과 2021년에 각각 1개월 이상의 종합검사를 진행했으며 당시 한국거래소 전현직 임직원의 규정 위반사례가 확인되면서 임직원 과태료와 기관경고를 받기도 했다.
거래소가 낙하산 인사를 쉽게 수용하는 데에는 과거 당국발 인사에 반발했다가 공공기관에 지정되는 등 뒤끝이 좋지 않았던 경험도 한몫을 한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거래소 이사장으로 이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내정됐다. 거래소는 노조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반대했고, 결국 이팔성 회장 대신 재경부 출신 이정환 이사장이 선임됐다.
하지만 대통령 측근인사를 반대한 파장은 컸다. 이정환 이사장 선임 직후 거래소는 골프접대비 문제로 검찰압수수색과 수사를 받았고, 결국 방만경영과 독점성 문제를 지적받으며 2009년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으로 공공기관에 지정됐다. 이정환 전 이사장 역시 압박에 못이겨 1년 반만에 중도퇴임했다.
한국거래소는 2015년에 다시 공공기관에서 지정 해제됐지만, 호되게 당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거래소 노조 관계자는 "금감원이 피감권한을 무기로 거래소 부이사장 자리를 금감원 퇴직자의 지정석으로 만들어 놨다"며 "경영진 역시 거부를 하고싶어도 종합검사를 받을까봐 거부를 못하는 상황인데, 차라리 낙하산 인사를 거부하고 종합검사를 세게 받았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