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마트에서 상품권 위조가 의심된다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일이 있습니다. 상품권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판매점의 제보 덕분입니다. 이마트는 위조가 위심되는 상품권을 직접 확보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상품권은 발행 이후 유통시장을 떠돌다가 소비자가 사용하면 다시 발행처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상품권이 무슨 돈이 된다고 유통시장이 따로 있을까요? 상품권은 현금과 동등한 가치를 갖습니다. 가치에 변화가 있어야 유통을 하고 마진을 남길 텐데 1만 원짜리 상품권으로는 1만 1원어치의 물건을 구매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식으로는 상품권 유통구조가 이해되기 어렵겠죠. 상품권 유통이 어떤 방법으로 수익을 만드는지 들여다보았습니다.
◇ 백화점·마트는 '현금확보'…유통업체는 '차익매매'
'현금 장사'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기업이 환영하는 방식입니다. 물건을 파는 족족 현금이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습니다. 물건은 아직 팔지도 않았는데 대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상품권'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런 거래를 하면 거래대금이 '부채'로 잡힙니다. 하지만 이런 부채는 '착한 빚'입니다. 결국 매출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품권 전문 유통업체는 통계청 업종 분류에 따른 '기타 금융업자'입니다. 상품권 유통은 기본적으로 금융업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융시장에는 '채권 할인'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채권을 발행할 때 권면금액보다 싸게 발행하는 것입니다. 그 차액은 채권을 사면 받을 수 있는 이자가 대신하는 구조입니다.
상품권도 비슷합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상품권 전문업체에 상품권을 넘길 때는 할인을 해서 액면가보다 싸게 팝니다. 현금을 확보하는 이익이 상품권 유통가격과 액면가격의 차이로 발생하는 손해보다 유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판매한 상품권이 100% 모두 사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럴 경우 상품권을 발행한 수익은 더욱 커집니다.
상품권 전문 유통업체들은 이렇게 매입한 상품권을 액면가보다는 싸게, 하지만 자기들이 매입한 가격보다는 비싸게 파는 방식으로 수익을 남깁니다.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백화점이나 할인마트 주변의 구두수선점 등이 상품권 소매상 역할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많이 판매됩니다.
◇ 전문발행기업, '사놓고 까먹은' 상품권으로 큰 수익
상품권을 전문적으로 발행하는 기업도 있습니다. 이런 곳은 앞서 설명한 것과는 다른 수익구조를 가집니다. 대표적인 곳이 문화상품권을 만드는 '한국문화진흥'입니다. 한국문화진흥은 '컬쳐랜드 문화상품권'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상품권을 발행하고 수수료를 통해 영업이익을 남깁니다. 컬쳐랜드 문화상품권을 소비자가 사용하면 사용처에서는 한국문화진흥에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을 청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둬들인 수수료 수익으로는 흑자가 나질 않습니다. 지난해 한국문화진흥의 수수료수익은 468억 원이지만 영업비용이 514억 원이나 됩니다. 결국 총 26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문화진흥이 비용관리를 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애시당초 한국문화진흥이 노리는 것은 영업이익이 아닙니다. 영업외수익이 타깃입니다. 상품권을 팔면 한국문화진흥에는 현금이 들어옵니다. 이렇게 들어온 현금에는 이자가 붙어 영업외수익으로 쌓입니다. 지난해 한국문화진흥의 이자수익은 15억 원입니다.
이자수익으로 영업손실을 메우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가장 큰 수익인 '소멸시효경과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품권을 산 사람들이 기한 내에 상품권을 쓰지 않아 발생하는 일명 '낙전(落錢)' 수익입니다. 지난해 한국문화진흥의 상품권소멸시효경과이익은 무려 112억 원입니다. 지난해 112억 원 어치의 컬쳐랜드 문화상품권이 지갑 속에 있다가 휴지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그 결과 한국문화진흥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42억 원 규모입니다. 전년보다 125% 증가했습니다. 이런 낙전 발생은 발행회사 입장에서는 수입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생돈을 날리는 셈입니다. 다들 지갑을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 시장 규모 '10조원'…규제 약해 'n번방' 등 악용
업계 등에 따르면 상품권 시장의 대략적인 규모는 연간 약 10조 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상품권의 발행과 유통이 자유롭다보니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지난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된 뒤 시장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통화량 산정에서는 제외되고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쓰는지도 파악할 수 없어 리베이트나 뇌물, 기업 비자금 조성 등에 악용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원래 상품권은 정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9년 상품권법 폐지 이후에는 1만 원 이상 상품권을 발행할 때 인지세를 내는 것을 빼면 사실상 감독이 없습니다. 2017년 20대 국회에서 상품권법 입법이 시도되기는 했지만 상임위(정무위)의 벽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습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아직 논의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모니터링과 규제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각종 부작용이 끊이질 않습니다. 특히 상품권이 구매와 사용은 쉬운데 추적이 안 된다는 점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수십여 명의 여성을 꾀어내 성착취 영상물을 찍게 하고, 이를 익명의 메신저를 통해 거래한 'n번방 사건'에서는 상품권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일부 가해자들은 '나는 문화상품권만 받아서 추적해도 나오지 않는다'며 신원을 숨겨오기도 했습니다.
성착취 영상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암호화폐와 함께 문화상품권이 화폐처럼 쓰였습니다. 일부 가해자는 문화상품권을 주겠다며 청소년을 유혹해 영상을 찍게 하기도 했습니다.
재래시장에서는 소위 상품권 '깡'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발행하는 '온누리상품권'은 액면가 대비 10% 할인된 가격에 구매가 가능합니다. 당국은 온누리상품권을 대량으로 발행해 재래시장 살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상당수의 물량이 '깡'으로 소화되면서 정책의 효과가 크게 떨어지는 상황입니다.
재래시장 근처에서는 온누리상품권이 풀릴 때마다 이를 매입하기 위해 은행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 상당수는 상품권을 싸게 매입하자마자 액면가대로 현금으로 바꾸는 '깡'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일부 재래시장에서는 상인회가 상품권 깡에 조직적으로 가담한 정황이 포착돼 검찰도 수사에 나섰다고 합니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상품권은 유통회사 입장에서 양날의 검"이라며 "현금을 돌게하고 소비를 촉진한다는 점은 좋지만 각종 범죄 등에 악용되는 문제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라도 더 큰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상품권 유통에 대한 면밀한 감시와 규제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