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개발연대 시대의 논리로 관치금융을 하고, 금융을 억압해서 나온 결과가 뭡니까. 금융 부실입니다."
민간경제연구소 한 연구위원의의 얘기다. 과거와는 확연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금융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금융 자체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데 금융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경제발전 혹은 실물지원을 위한 도구나 수단이라는 인식이 강할 때 시장에 맡겨야 할 가격(금리 혹은 수수료 등)에 자꾸 손을 대고 이는 또한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직격탄을 맞은 금융선진국에선 금융산업(자본시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라는 인식에 대한 반성론이 커지긴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금융선진국 얘기다. 우리나라는 부가가치는 고사하고 산업 자체로 경쟁력을 갖춰야한다는 인식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금융회사가 돈을 버는 것 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여기에 수수료나 예대마진으로 이익이 늘기라도 하면 서민이나 영세 기업들의 고혈을 빠는 흡혈귀(?) 취급을 받는 실정이다. 이런 인식으론 선진은행으로 발돋움하는 것도 요원해보인다.
◇ 시장 원리?…툭하면 가격에 손대
툭하면 정치권이나 정부가 가격에 손을 대는 것도 이런 논리와 다르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을 구체화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최근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 방안을 발표했다. 엄밀히 따지면 중소상공인의 기준을 완화해 수수료 인하 효과를 냈다.
신용카드 가맹점수수료 인하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단골메뉴로 자리잡았다. 나랏 돈(재정) 한푼을 안쓰고도 중소상공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 있으니 이만한 아이템이 없다. 실제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는 지난 2007년 이후 올해까지 총 9차례에 걸쳐 인하됐다. 2015년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원가 산정 이후 3년이 되는 오는 2018년 원가 재산정을 거쳐 또다시 수수료가 인하될 가능성이 높다. 내년엔 지방선거도 예정돼 있으니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은행의 대고객 수수료도 마찬가지다. 한국씨티은행이 논란이 된 계좌유지수수료를 부과키로 했지만 극히 제한적인 수준에서 적용한다. 당시 금융당국이 고령자, 미성년자, 기존 거래 고객 등을 제외하는 식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다. 금융당국은 가격 자율화를 천명했지만 사실상 직간접적으로 수수료를 통제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또 후보시절 '금융수수료 적정성 심사 제도' 도입을 공약했다. 금융소비자 보호 차원이지만 사실상 수수료 인상을 막겠다는 취지여서 시장원리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 '공짜는 없다' 소비자 혜택 축소 부메랑
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를 비롯해 실손의료보험료 인하 등의 공약이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통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금융논리를 개입시킬 여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금융홀대론이 나온 배경이 됐던 금융위원장까지 사실상 공석인 상태다. 금융위의 말발이 제대로 먹힐리 없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과거처럼 은행들 팔을 비틀어 대기업에 돈을 대줬던 것과 비교하긴 어렵지만 결국 다른 방식으로 금융소비자에게 돌아갈 혜택과 서비스를 줄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분석이다.
▲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배현기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금융회사가 그로인해)손실을 입게 되면 금융회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로 그만큼 카드사의 매출이 감소하면 카드사들은 결국 부가서비스 등의 소비자 혜택을 줄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과거 리터당 100원까지 할인해줬던 신용카드 주유소 할인 서비스를 지금은 눈을 씻어도 찾기 힘든 것도 이런 이유다.
은행 자동화기기(ATM) 수수료도 마찬가지다. 은행들이 자동화기기 운영으로 인한 손실이 더 확대되면 결국 자동화기기를 줄일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은 더 비싼 수수료를 물고 비금융권 전문회사에서 운영하는 기계를 이용하게 되는 식이다. 하영구 은행연합회장도 지난 2월 기자간담회에서 이를 언급하며 "수수료 등 정상적인 수준의 보상이 되지 않으면 결국 금융소비자 불편으로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 경쟁력 갖춰야 경제 선순환 가능
금융수수료 적정성 심사와 같은 방식으로 가격에 개입하는 것은 결국 자율성을 침해할뿐 아니라 금융산업의 발전이나 혁신을 가로막는 부작용이 따른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하 회장이 "수수료 문제는 단순히 돈을 더 벌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차별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은행에 따라 계좌수수료 혹은 창구수수료를 받기도 하고 반대로 계좌를 만들기만 해도 포인트를 주거나 혹은 창구에 와서 거래하는 것만으로 특전을 주는 식으로 차별화할 수 있다. 이것이 곧 금융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 금융지주 회장은 "은행이 돈을 버는 것이 죄악시 되고 있다"면서 "돈을 벌어야 경기가 어려울 때 완충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의 속성상 산업으로서 홀로 설 수는 없지만 가격 차별화, 신용정책 등을 통해 차별화하고 경쟁력을 갖춰야 금융 자체로도 발전하고 결국 도구로서의 제기능도 다할 수 있다는 데에 금융권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