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국에서 영업을 전개하는 2000여 개 밴 대리점 실적은 전년 대비 50% 이상 깎인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자영업 분들 상황이 안 좋으면 우리도 직격탄을 맞는 거예요. 여기에 결제시장이 변하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조차 없죠. 사장님들 대부분이 빚내서 장사하고 있을 겁니다"
밴(VAN) 대리점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말부터 일부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코로나19로 오프라인매장 카드 결제액이 급감하면서 수입이 뚝 끊겼다.
밴 대리점은 카드사와 카드 가맹점 사이에서 카드전표 매입과 승인중계 업무를 처리하는 밴사의 업무를 대행한다. 결제기기 설치 및 수리 업무에 주력하면서 가맹점 모집 영업에도 나선다. 전국 각지에서 2000여 곳이 영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업계 종사자는 3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밴 대리점은 과거 신용카드 결제 인프라 구축 주역이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카드사 수익성 악화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로 비용절감 1순위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간편결제와 배달앱 서비스 확대 등 결제시장의 구조적인 변화로 밴 대리점 상황은 재기불능으로 치닫고 있다는 지적이다.
◇ 밴 대리점 "우리는 을(乙)이 아닌 병(丙)..카드결제 급감 타격 고스란히"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코로나19 여파로 오프라인 매장의 카드결제 건수가 급감하면서 일부 영세 밴 대리점이 빚을 내면서 밴 본사에 매출을 보전해주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밴 대리점과 밴 본사 간 계약 과정에서 약정한 내용이 경기악화 여파로 달성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다.
밴 대리점은 오프라인 매장을 중심으로 영업 활동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서는 밴 본사에서 결제 단말기와 관련 통신장비를 들여와야 하는데 밴 대리점 대부분이 영세한 까닭에 관련 비용을 대개 할부로 충당한다. 본사는 할부를 허락하는 대신 대리점에 일정 수준 이상의 가맹점 카드결제 건수를 요구한다.
통신사가 대리점에 휴대폰을 할부로 내주는 대신 대리점이 고객에게 일정수준 이상의 요금제를 판매할 것을 요구한다고 보면 쉽다. 밴 본사는 전표매입과 승인중계를 통해 일정 수준의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올린다. 결제 건수 확정은 어느정도 고정 수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약정이 지켜지지 않을 때다. 밴 본사는 카드사에서 받은 수수료 중 일부를 떼 밴 대리점에 지급하는데 가맹점 결제액이 약정 수준에 미달할 경우 부족한 만큼의 차익을 수수료에서 떼서 지급한다. 차익은 적게는 120%에서 많게는 200%까지 다양한 패널티 배율이 적용된다.
관련 약정 내용을 가맹점 계약서에 명시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밴 대리점 경쟁이 심해지면서 본사와 대리점 사이만의 암묵적 약속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가맹점 신규 계약을 따기 위해서는 약정 내용을 빼는 것이 영업을 따 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 정부 출범 이후 카드가맹점 수수료가 인하되면서 카드사와 밴사 수익성이 떨어지자 본사와 대리점 사이 약정 관행은 더 엄격한 형태로 자리잡게 됐다는 설명이다. 밴 대리점 업계에서는 해당 약정 관행을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일부 밴 본사는 '초기 투자를 대행한다'고 표현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코로나19 여파는 고스란히 밴 대리점의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프라인매장 카드 결제 건수가 급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밴 대리점의 약정 달성 실패로 이어지고 밴 본사는 밴 대리점에 제공하는 수수료를 차익만큼 줄여서 제공하게 된다.
강남구에서 밴 대리점을 운영하는 김 모씨는 "일부 밴 본사는 패널티 적용을 뒤로 미뤄주는 경우도 있지만 빚이 조용히 쌓여가는 것과 다른 게 없다"며 "본사에서 받는 수수료 수익이 약정 패널티로 급감하면서 급전을 빌려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이 정말 많아졌다"고 토로했다.
인근 또다른 밴 대리점 관계자는 "카드사→밴 본사→밴 대리점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 속에서 밴 대리점은 가장 밑바닥에 있다"며 "카드사와 본사, 카드가맹점이 모두 힘들다고 하는 판국에 대리점까지 앞에 나서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눈치가 보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 간편결제·배달앱 확대도 악재
간편결제 인프라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도 부담이다. 서울시에서 제로페이 운영을 위탁받고 있는 간편결제진흥원은 밴 대리점 업계와 손잡고 QR리더기 설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밴 대리점 입장에선 일거리가 늘어나 좋을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제로페이와 같은 간편결제사업은 카드가맹점 수수료를 절감해 소상공인 부담을 덜어준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실제 연매출 8억원 이하 가맹점의 경우 제로페이 사용 수수료는 내지 않아도 된다. 신용카드 가맹점은 연매출 3억원 이하여야 우대수수료율을 적용받아 가장 낮은 수준의 0.8%의 수수료를 낸다.
간편결제는 인터넷을 이용해 카드 사용자와 가맹점 사이 계좌거래가 직접 이뤄지는 구조다. 일반 카드결제와 달리 밴 대리점이 챙기는 수수료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밴 대리점이 간편결제 인프라를 구축해 일반 카드결제 비중이 작아지면 밴 대리점 지갑은 오히려 가벼워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밴 대리점 협회 관계자는 "간편결제 도입 초기에 기계 관리비 정도 수입이 유입될 수는 있지만 점점 우리 목을 우리가 조르게 되는 꼴"이라며 "밴 업계에서도 결제시장 변화 움직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상생 방안이 검토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배달앱 활성화도 밴 대리점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 배달앱을 통한 주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프라인 매장 카드 결제 수가 줄어드기 때문에 밴 대리점이 챙길 수 있는 수수료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배달앱 업체가 매장 결제 인프라를 함께 공유하고 있어 관리 비용만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이와 관련 밴 업계 1위인 코스닥 상장사 나이스정보통신의 지난해 카드조회 단말기 신규 매출은 137억원으로 전년대비 37% 감소했다. 2017년 242억원 이후 3년 연속 줄어들고 있다. 밴 본사가 카드사에서 받는 용역수수료도 정액제에서 정률제로 바뀌면서 매출이 전년대비 6.3% 감소한 2032억원에 그쳤다.
나이스정보통신 관계자는 "기기 교체와 신규 설치 수요가 줄어든 결과로 새로운 매출처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도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밴 업계의 어려운 상황이 구조적이어서 업황이 개선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간편결제 규모는 2016년 일평균 255억원에서 작년 1~9월 일평균 1656억원으로 6배 이상 증가했다. 여기에 정부의 카드수수료 인하정책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카드사들은 할부금융과 리스사업 등 새로운 수익원 발굴에 나서고 있다. 밴 업계의 설자리가 계속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결제시장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밴 본사와 밴 대리점 등과 같은 관련 업체들의 역할이 축소될 수 밖에 없다"며 "하지만 역할이 사라지기는 어려워 상생을 위한 논의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밴 대리점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세한 업체가 많은 탓에 업체 수, 경영 상황 등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