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간판을 단 주유소에서 파는 기름은 차이가 있을까? 답은 '큰 차이가 없다'다. 어떤 정유사에서 공급한 기름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 첨가하는 '식별제'가 다를 뿐, 품질과 성분은 비슷하다. 고객들이 품질 좋은 기름을 파는 주유소를 찾는 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주유소는 제품 차별화가 안 되는 만큼 고객 맞춤형 전략을 세우기 어렵다. 여타 소매업체들과 같이 앱을 통한 소비자 구매행태 분석도 어렵다. 이용자들이 현장 결제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차, 가벼운 정비 등의 서비스를 추가로 제공하는데 그친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주유소와 고객 간 거리를 좁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제품, 소비자에 주목하지 않고 주유소 그 자체를 새로 단장하는 시도다. 최근 서울 강남구 논현로 GS타워에서 만난 장대기 GS칼텍스 경영정보화팀 대리가 혁신의 주인공이다.
◇ 혁신은 융합에서
장대기 대리는 데이터 분석과 떼려야 뗄 수 없다. 2012년 입사 때부터 전사적자원관리(ERP)팀에 몸을 담았다. 생산, 물류, 회계 내역 등을 전산환해 과거 이력을 추적하는 시스템을 새로 도입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장 대리는 2017년 경영정보화팀 신설과 동시에 부서를 옮기며 데이터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장 대리는 새로운 부서에 와서 좀더 적극적 업무를 맡고 있다. ERP팀이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된 과거 이력을 분석한다면, 경영정보화팀은 현재 업무 전반을 데이터화해 업무처리 효율성을 높이는 체질개선이 목적이다. 경영정보화팀은 팀장을 포함해 총 5명으로 구성된다.
장 대리는 "업무를 데이터화하고 분석해야만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 가상 디지털 기술도 현장에 접목할 수 있다"며 "데이터화가 이뤄지고 나면 기술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장 대리는 경영정보화팀으로 옮긴 뒤 주유소에 들어서는 자동차 출입내역을 빅데이터화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고급 승용차가 많이 드나드는 주유소엔 고급 휘발유를 더 구비하거나 일반식 세차 대신 손방식 세차를 제공하는 등 고객 차별화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장 대리는 "주유소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차량 영상정보를 추출한다. 그뒤 차량 이미지를 머신러닝으로 학습한 시스템이 차량 차종, 연식을 텍스트로 바꿔 빅데이터화해 분류하는 방식"이라며 "주유소 한 곳에 적용한 결과 기술적용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왔다. 마케팅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고 말했다.
장 대리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면서 대학 때 배운 심리학 전공을 십분 활용했다. 운전자가 주유소를 비합리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를 감안하도록 알고리즘에 고안했다.
고객들이 주유소를 이용할 때 종종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익숙한 주유소임에도 입구를 지나친 뒤 빙돌아 출구로 들어오기도 한다.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가는 동선을 기준으로 차량 대수를 세면 데이터 왜곡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밖에 주유소에서 세차를 하고 나간 뒤 다시 들어와 주유를 하는 경우 출입차량이 여러 대로 잡힌다.
시범 적용된 시스템은 이같은 예외사항을 걸러낸다. 장 대리는 심리학에서 배운 인간의 무의식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영학에서 배운 회사(주유소) 운영에 정보통신기술(IT), 심리학 지식을 더한 셈이다.
장 대리는 "소비자들에게 주유소내 동선이 꼬인 이유를 물어보면 대다수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며 "주유소 이용객들을 관찰해 아이이디어를 낼 때 심리학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전자상거래에 빅데이터, 로봇,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를 접목하려는 아마존도 주목했다. 아마존 계열사로 클라우드 서비스 사업을 하는 아마존웹서비스(AWS)가 지난달 1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한 'AWS 써밋 서울'에 초청돼 이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각국 도시에서 여러 혁신 사례를 소개하는 AWS 써밋에 정유사가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 대리는 "GS칼텍스는 제조업이면서도 생산 현장뿐만 아니라 고객, 시장, 위험관리 영역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써밋에서 공유해 이에 대해 신선하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말했다.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면 주유소가 융합 장소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고객의 요구가 담긴 내·외부 데이터를 참고해 택배 수거지를 포함해 커피 매장 등의 편의시설을 미리 들여놓을 수 있다. 고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게 아닌 오게 만드는 적극적 역할이다. 주유소 사업자는 데이터란 명확한 근거가 있어 투자 불확실성도 줄이게 된다.
회사 손익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 정유사들은 전방산업인 주유소 수익성 악화로 국내 기름 공급사업에서 저조한 성적표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주유소 업계는 공급과잉으로 최근 평균 영업이익률이 1~2%대로 과거에 비해 악화됐다.
GS칼텍스 소유 주유소가 이같은 시스템을 바탕으로 수익성을 개선하면 회사가 얻는 뭉칫돈도 늘고, 회사가 브랜드 주유소에 더 많은 기름을 팔면서 이익이 증가하는 상승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장 대리는 "왜 고객이 다른 주유소를 가지 않고 GS칼텍스 주유소를 방문해야 하는지 차별성을 만들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 "의사결정, 데이터 기반해야"
장 대리를 포함해 경영정보화팀 인원들은 사무실에 앉아 숫자만 바라보지 않는다. 현장을 직접 뛰어다닌다. 아이디어를 고안해도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은 만큼, 데이터분석 때 시행착오를 줄여 완성도를 높이려는 일환이다.
장 대리는 "경영정보화팀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고안할 때 현장에서만 알 수 있는 세부사항을 놓칠 수 있다"며 "여러 부서 임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의견을 교환한다"고 말했다.
장 대리는 장기적으로 현장 직원, 경영층을 포함해 회사내 모든 구성원들의 의사결정이 데이터에 기반해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 "경영정보화팀이 추구하는 것은 모든 업무가 자동화돼 인력이 필요 없는 회사가 아니다. 임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전략을 수립할 때 정량화된 판단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업무효율, 생산성을 높여 종국에 가치 있는 업무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게 팀의 목표"라고 말했다.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