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우, 정대우, 정대우…." 투표지를 펼칠 때마다 정대우(대우건설)의 이름이 호명됐다.
6월 28일 고척4구역 재개발 시공사 선정 총회 현장이다. 정대우와 차현대(현대엔지니어링)는 투표 과정을 참관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내 투표용지가 모이고, 개표는 부재자 투표(서면 결의)부터 시작했다.
부재자 투표 결과는 9대 1로 정대우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정대우는 '이겼구나!' 생각하며 안도했다.
조합은 곧바로 현장 투표용지를 열었다. 이번엔 정대우와 차현대의 이름이 번갈아가며 불렸다. 개표장이 긴장감으로 휩싸인 가운데 불청객처럼 '무효표'가 나왔다. 정대우 쪽 4표, 차현대 쪽 2표였다.
"어떻게 할까요?" 개표자의 물음에 차현대는 '무효'를 외쳤다. 부재자 투표에서의 승리 기운이 가시지 않았던 걸까. 정대우는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고, 무효표 6표는 모두 '무효 처리'로 진행됐다.
# 사건번호1. 전쟁의 시작은 '무효표'
개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투표에 참여한 조합원 246명 중 과반 초과(124표)의 표를 받는 쪽이 시공사로 선정된다. 하지만 정대우가 122표, 차현대가 118표였다. 조합은 선언했다. "두 회사 모두 과반의 의결권을 얻지 못해 이 안건은 부결입니다."
정대우는 이의를 제기했다. "아까 무효표 처리된 용지를 보니까 대우건설을 지지하는 의사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투표에 앞서 볼펜이든 도장이든 어느 한 쪽에 확실히 의사표시가 돼 있으면 인정하기로 합의했던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차현대는 정대우의 의견에 반박했다. "조합에서 부결됐다고 종결했는데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꿉니까!"
이때부터 갈등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 사건번호2. 차현대 손 들어준 구청·정대우 손 든 조합장
정대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대우 쪽 무효표 4표가 유효 처리되면 126표를 득표해 고척4구역의 시공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대우는 6월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해당 표를 유효표로 봐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이후 박경순 고척4구역 조합장은 7월 5일 정대우 측에 공문을 보내 "정대우의 무효표 4장 중 3장을 유효표로 인정하겠다"며 시공사 선정 의사를 밝혔다. 정대우와 차현대의 희비가 엇갈렸다.
'총회도 없이 투표를 번복하다니….' 차현대는 7월 9일 조합에 공문을 발송해 소송 진행 의사를 표시했다. 바로 전날인 8일 조합원 일부가 구로구청에 시공사를 다시 선정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한 것도 힘이 됐다. 결국 24일 법원에 조합과 정대우의 '도급계약 체결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이 와중에 구로구청은 차현대의 손을 들어줬다. 구로구청은 "총회에서 부결 의결을 선포했는데 별도의 총회 없이 시공사 선정을 확정 공고한 사항은 효력이 없다"며 탄원서에 대한 답을 보냈다.
하지만 판세는 또 바뀌었다. 박경순 조합장이 8월 8일 이사회와 대의원회 의결을 거쳐 조합원들에게 8월 24일 임시총회를 열겠다고 공고한 것. 총회에서는 ▲정대우의 무효표를 유효표로 처리하는 안 ▲정대우의 시공사 선정을 가결하는 안 ▲정대우의 시공사 확정 안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정대우를 시공사로 선정하겠다는 뜻이었다.
# 사건번호3. 총회 무산으로 '멀어진 시공권'
'총회가 열리면 끝이다.' 차현대는 초조해졌다. 이렇게 정대우에게 시공권이 넘어가게 할 수 없었다. 차현대가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법원이 차현대의 손을 들어줬다. 7월 24일 법원에 냈던 도급계약 체결 가처분 신청이 인용된 것.
하지만 '가처분'에 불과해 조합이 예정대로 8월 24일 총회를 열고 정대우에게 시공권을 넘기겠다고 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그때 차현대의 변호사가 '총회개최금지가처분' 신청을 제안했다. 일단 총회를 막자는 의도였다.
차현대는 8월 13일 조용히 법원에 총회개최금지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은 8월 22일 이번에도 차현대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이 사건 의결의 내용은 도시정비법제29조 제1항을 위반해 무효"라며 "강행규정을 위반해 무효인 내용을 안건으로 하는 이 사건 총회를 개최하는 건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도시정비법 제29조(계약의 방법 및 시공사 선정 등) 1항은 추진위원장 또는 사업시행자(청산인을 포함한다)는 이 법 또는 다른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약(공사, 용역, 물품구매 및 제조 등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을 체결하려면 일반경쟁에 부쳐야 한다.
결국 예정됐던 조합원 총회는 무산됐다.
# '본안 소송' 관건…싸움 장기화 불가피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고척4구역 재개발 시공권을 두고 대우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조합, 지자체, 법원 등이 얽히며 승기가 양사를 오갔다. 두달 사이 고척4구역을 두고 벌어진 양사의 팽팽한 싸움을 재구성해 봤다.
시장에선 총회가 열렸다면 대우건설이 시공사로 선정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총회가 무산되면서 향후 판세는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조합은 7월 24일 현대엔지니어링이 법원에 낸 도급계약 체결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이의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최근 인용된 총회개최금지가처분에 대해서도 이의 신청을 하고, 현대엔지니어링에 '본안소송'을 제기하게 하는 제소명령을 신청할 예정으로 전해진다.
법원이 현대엔지니어링에 본안소송을 제기하라고 하면 현대엔지니어링과 조합의 법적 싸움이 시작된다. 다만 이 경우 통상 1심 판결까지 3~6개월 정도 걸리는 걸 감안하면 올해 안엔 시공사 선정 등 사업 추진은 불가능해진다.
다만 박 조합장은 가처분 결과가 나온 직후 조합원에게 보낸 문자를 통해 "무효표를 유효표로 인정하고 대우건설과 계약을 체결할것"이라며 "소송은 소송대로 진행하면서 업무추진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우건설 관계자도 "조합에서 대우건설을 시공사로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만큼 조합을 보조하는 입장에 서겠다"며 "(본안소송)1심 판결에서 조합의 손을 들어주면 이를 근거로 대우건설이 시공사로써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현대엔지니어링은 본안소송이 아닌 재입찰을 통해 원점에서 다시 경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총회 투표 결과에서 불발된 것을 조합장이 임의로 번복한 것은 법률상 문제가 있고, 가처분이 인용됐다는 게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며 "구로구청에서도 도시정비법 등에 맞게 총회를 진행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본안소송까지 가는 건 우리도 원치 않는다"면서도 "재입찰 하면 3개월 안에 시공사 선정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연내 마무리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