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이 원희룡 국토부 장관에게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당부했다는 소식이 있었죠.
이에 원 장관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추진하는 네옴시티 등 해외 곳곳에서 대규모 도시 건설과 인프라 사업이 활성화하고 있으니 국내 건설사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는데요. 민관이 함께 '팀 코리아'를 만들어 제2의 해외 건설 붐을 일으키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중동의 대규모 도시 사업에서 아예 철수하겠다는 사례가 나와 눈길을 끕니다. 한화건설이 지난 2012년 수주했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사업에서 발을 뺀 건데요.
비스마야 신도시 '계약 해지'…합병 앞두고 부실 털기
한화건설은 지난 7일 "이라크에서 진행되고 있던 비스마야 신도시 및 사회기반시설 공사와 관련해 NIC(이라크 투자위원회)의 기성금 지연지급 및 미지급 등 NIC의 계약위반을 이유로 공사도급계약에 따라 NIC에 해지 통지를 했다"며 "이 통지에 따른 해지의 효력은 21일 후에 발생한다"고 공시했습니다.
이 사업은 총사업비가 14조원이 넘는 사업으로 중동 사막에 판교의 두 배 이상 면적에 신도시를 세우는 프로젝트로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에 오는 2027년 말까지 주택 10만 가구와 교육시설, 도로 등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사업인데요. 올해 6월 말 기준으로 주택건설은 45%, 사회기반시설은 29% 공정률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하늘이 준 기회"라며 수차례 이라크 현지를 방문하는 등 공을 들인 사업으로도 알려졌는데요.
하지만 한화건설 측에 따르면 이 사업은 지속해 삐걱거렸다고 합니다. 공사비 문제로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데다가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공사가 거의 멈춘 상태였습니다.
한화건설은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선수금을 25%가량 받았다고 하는데요. 이 선수금 잔액과 현재 미수금(약 8900억원)이 비슷한 수준이 되면서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는 입장입니다.
실제 한화건설은 비스마야 신도시 공사 지연 등으로 인해 지난 2017년 연간 영업적자로 어닝쇼크를 기록했다가 이듬해에는 사업이 다시 순항하며 흑자전환하는 등 그간의 실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화그룹은 내달 1일 한화건설을 ㈜한화로 흡수합병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한화건설이 공사를 계속 진행할 경우 부실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고 판단해 '손절'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라며 놀라워하는 반응입니다.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점은 합리적인 경영전략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할 경우 향후 이라크에서 추가적으로 사업을 수주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화건설 측은 이라크 정세가 혼란해 사업 진행이 개선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입니다. 실제 이라크에서는 수년 전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이슬람국가(IS) 전쟁에 이어 내부적으로도 총리가 교체되는 등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수년전에도 '중동 붐'?…정세 불안에 수포로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신도시 등 중동 건설 사업의 이면을 보여주는 일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중동지역의 경우 아직 주거와 에너지 발전 인프라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이와 관련한 대규모 프로젝트가 추진되곤 하는데요. 하지만 정세가 불안정한 탓에 사업이 지연되는 등 차질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는데요. 과거 박근혜 정부는 지난 2015년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겠다며 대통령이 직접 이란 등 중동 국가를 순방하는 등 분위기를 띄운 바 있습니다. 52조원을 수주해 잭팟을 터뜨렸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했고요.
하지만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란과의 갈등이 커졌고,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습니다.
실제 2017년 현대엔지니어링과 현대건설이 수주한 3조8000억원 규모의 이란 '사우스파12 2단계 확장공사'와 대림산업(현 DL이앤씨)이 따낸 2조2000억원 규모의 이란 이스파한 오일 정유회사(EORC)의 이스파한 정유공장 개선 공사 등이 해지되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지속하면서 '제2의 중동 붐'이라는 단어는 쏙 들어갔고요.
해외 사업이 정세 변화로 차질을 빚게 되는 건 비단 중동뿐만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내 건설사들이 러시아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줄줄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해외 건설 사업은 성공하면 '잭팟'이 되겠지만, 불확실성으로 인한 리스크가 크다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물론 국내 건설사들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제 살 깎기'식 수주 경쟁을 벌이곤 했는데요. 그러다 손해를 보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수익성을 따져가며 신중한 모습이기도 하고요.
정부는 해외 건설에서 연 500억 달러 수주와 세계 4대 해외건설 강국 진입을 목표로 내걸었는데요. 지난해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건설 수주액은 300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는데요.
건설업계에서는 무작정 수주액만 늘리기보다는 수익성이 높은 사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역량 강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는 "국내 건설사들이 앞으로 해외 사업을 확대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정부 차원에서 목표액을 제시하거나 특정 사업의 수주를 부추기는 등의 이슈 몰이보다는 중장기적으로 성장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