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특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품들의 경우 결정적 한 끗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미군이가는곳엔늘스팸 #부대찌개 #무수비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저변을 넓힌 스팸은 이후에도 미군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미군의 주요 보급품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병사들이 싫어하건 말건 상관없었습니다. 싼값에, 대량으로, 오래 보관 가능한 단백질 공급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군 당국에는 이만한 효자가 없죠. 그러다 보니 미군이 전투에 참가하는 곳에는 늘 스팸이 함께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은 물론 해외 미군 기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스팸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을 통해 스팸이 유입됐습니다. 호멜 홈페이지에 소개된 스팸 판매 지역 지도를 살펴보면 미군이 참전했던 지역이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본의 아니게 미군이 '스팸 전도사'가 된 셈입니다.
스팸은 전 세계로 퍼져가면서 각 나라의 음식들과 접목돼 그 나라의 음식으로 뿌리내리거나, 새로운 음식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먹을 것이 귀했던 우리 국민들은 미군 부대를 통해 암암리에 흘러나온 스팸과 소시지 등을 가져다 찌개를 끓였습니다. 이후 여기에 갖가지 양념 등이 추가되면서 지금의 부대찌개가 된 겁니다.
스팸은 지금도 부대찌개의 주재료 중 하나입니다. 이제는 우리 음식으로 완전히 정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스팸은 유독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스팸의 짭짤한 맛과 쌀밥이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 국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김치와도 잘 어울립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스팸 판매량 2위에 올라있습니다.
사실 스팸은 고향인 미국에서는 이제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탄탄한 수요층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스팸은 주머니 사정이 어렵거나 유난히 스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잘 사 먹지 않는 식품이라고 합니다.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굳이 스팸을 먹이려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값싸고 영양성분도 별로인 식품 정도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미국에서는 한국인들의 스팸 사랑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명절용 고급 선물 세트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 신기하다는 반응입니다. 뉴욕 타임스 등 미국 언론에서도 여러 차례 한국인들의 스팸 사랑을 집중 보도한 바 있습니다. 호멜로서는 한국이 참 고마울 겁니다. 호멜의 한국 사랑은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에 잘 드러나있습니다.
호멜은 홈페이지에 스팸을 활용한 여러 레시피 중 하나로 부대찌개를 맨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소개된 부대찌개의 미국명은 'SPAM® Classic Budae Jjigae Army Stew'입니다. 상세한 레시피를 소개하고 직접 만들어 본 사람들의 별점을 매기고 있었는데요. 부대찌개는 5점 만점에 4.9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대찌개가 미국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나 봅니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는 주먹밥인 '스팸 오니기리'가 있고 중화권에서는 대만이나 홍콩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의외로 유럽에서는 영국에서 판매량이 꽤 많다고 하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스팸을 활용한 요리 중 부대찌개처럼 유명한 것은 '무수비'가 있습니다. 일본 주먹밥의 영향을 받아 하와이에서 만든 요리인데 밥 위에 구운 스팸을 얹고 김으로 싼 것을 말합니다.
하와이는 미국 내에서도 스팸 소비량이 엄청난 곳으로 유명합니다. 맥도날드, 버거킹과 같은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들도 하와이에서는 스팸을 넣은 햄버거를 개발해 판매할 정도니까요. 이 밖에 괌도 스팸 소비가 많은 곳입니다. 이들은 모두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스팸과 미군은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봅니다.
#스팸메일 #몬티파이선 #메뉴판엔스팸이가득
스팸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붙는 것이 있습니다. '스팸 메일'입니다. 스팸 메일의 뜻은 여러분들도 모두 아실 겁니다. 그런데 스팸 메일에는 왜 '스팸'이 붙었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또 다시 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번 무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입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렸죠? 영국의 스팸 소비량이 의외로 많았다고요. 스팸 메일에 스팸이 붙은 이유는 그 당시 영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아주 박살이 납니다. 전쟁 초기 독일과의 전쟁에서 고전한데다 전쟁에 국가의 재정을 쏟아붓는 바람에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습니다. 특히 식량난이 심각했죠. 가뜩이나 척박한 영국 땅에서 그나마 쉽게 재배해 먹을 수 있는 작물은 감자뿐이었습니다. 이때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이 등장합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루스벨트는 대(對)연합국 물자지원 계획을 발표합니다.
영국은 이때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특히 국민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했던 만큼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이 영국에 보낸 것 중 하나가 바로 스팸입니다. 미국은 정말 영국에 차고 넘칠 만큼 스팸을 공급합니다. 영국민들도 처음에는 좋아했습니다. 만날 감자만 먹다가 고열량 단백질 통조림을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입맛에도 한계효용의 법칙은 작용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맛있어도 자꾸 먹다보면 질립니다. 인간의 입맛은 그렇게 간사합니다. 영국은 전쟁 중은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국가에서 배급을 실시했습니다. 배급에서 스팸이 빠지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팸은 차고 넘쳤고 영국민들은 스팸이라면 기겁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되죠. 당시 영국을 '스팸 랜드'라고 불렀을 정도였다고 하니 영국에 얼마나 많은 스팸이 공급됐는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이처럼 스팸에 질린 영국민들의 생각을 잘 표현한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코미디 그룹인 '몬티 파이선(Monty python)'이 연기했던 '몬티 파이선의 날아다니는 서커스(Monty python's Flying Circus)'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BBC에서 1969년에서 1974년까지 총 45회가 방송됐습니다. 영국 사회의 부조리를 잘 표현한 블랙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유명합니다.
스팸 메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중 '몬티 파이선의 날아다니는 서커스'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집니다. 25회 '스팸'편에서 등장합니다. 한 부부가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합니다. 그러자 종업원이 가능한 메뉴를 불러줍니다. 총 10개인데 그중 8개에 스팸이 들어갑니다. 이런 식입니다. '계란과 베이컨과 스팸', '계란과 베이컨과 소시지와 스팸', '스팸과 베이컨과 소시지와 스팸'.
기가 찬 부부는 퇴장합니다. 그만큼 당시 영국에는 스팸이 넘치다 못해 남아돌아 영국민들이 스팸 이야기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때부터 스팸이라는 단어에는 '원하지 않는데 잔뜩 들어있는 물건'이라는 의미가 추가됐고 스팸 메일, 스팸 문자 등에 사용되기 시작됐다고 합니다. 스팸은 단순한 식품이 아닌 당시의 시대 상황을 투영한 상징적인 제품인 듯합니다.
#스팸은돼지고기만 #런천미트는돼지에닭고기까지
대형마트에서 스팸이 놓인 매대를 살펴보면 '런천 미트'라는 것을 보신 일이 있을 겁니다. 얼핏 보기에는 스팸이나 런천 미트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가격 차이가 꽤 납니다. 스팸이 훨씬 비쌉니다. 사실 런천 미트(luncheon meat)의 범위는 매우 넓습니다. 미리 조리돼있어 덥히지 않고 바로 얇게 썰어서 먹을 수 있는 고기류를 통칭하는 콜드 컷(cold cut)에 속합니다.
주로 샌드위치나 빵에 넣어 점심으로 손쉽게 먹을 수 있어 런천 미트 혹은 런치 미트(lunch meat)라고도 불리죠. 스팸도 런천 미트의 한 종류입니다. 다시 말해 런천 미트가 더 큰 의미고 스팸은 그 안에 포함되는 겁니다. 다만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스팸과 런천 미트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주재료와 그 비율입니다.
스팸의 경우 주재료가 돼지고기입니다. 함유량도 90%가 넘습니다. 반면 런천 미트에는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닭고기가 섞여 있습니다. 스팸에 비해 돼지고기 함유량을 낮추고 대신 그 자리를 닭고기로 채운 겁니다. 아울러 런천 미트에는 밀가루나 전분의 함유량이 높습니다.요약하면 스팸은 런천 미트의 고급 버전입니다. 스팸을 비롯해 리챔,로스팜 등 '~팸, ~팜, ~챔' 등은 스팸과 같은 고급형 런천 미트입니다.
그런데 왜 업체들은 고급형 런천 미트에는 모두 다른 제품명을 쓸까요? 그것은 런천 미트는 '일반명사'여서입니다.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초코파이라는 제품명을 오리온도 쓰고 롯데제과도 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스팸, 리챔 등은 '고유명사'입니다. 따라서 CJ제일제당도, 동원F&B도 고급 런천 미트에는 스팸, 리챔라는 고유명사를, 일반 런천 미트는 그냥 런천 미트라고 이름 붙여 판매합니다.
스팸과 런천 미트는 맛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스팸의 경우 돼지고기와 지방으로 이뤄져 훨씬 기름지고 맛의 풍미가 깊습니다. 반면 런천 미트는 돼지고기 함유량이 스팸에 비해 적기 때문에 풍미가 떨어집니다. 여기에 밀가루와 전분의 함유량이 많아 맛은 '그냥 햄' 정도입니다. 따라서 술집에서 스팸 안주를 시켰는데 런천 미트가 나왔다면 이건 당당히 컴플레인하셔도 됩니다. 스팸과 런천미트는 엄연히 다르니까요.
#그밖의에피소드 #뚜껑파동
스팸은 최근 국내에서도 이슈가 됐습니다. '뚜껑' 때문입니다. CJ제일제당이 생산하는 스팸에는 노란 뚜껑이 씌워져 있습니다. 한국 스팸에만 있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노란 뚜껑의 용도에 대해 소비자들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뚜껑이 있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스팸의 캔을 따서 먹고 나면 씌워둘 뚜껑 정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한 환경단체에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스팸 노란 뚜껑의 용도가 먹다 남은 스팸의 장기 보관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먹다 남은 스팸을 노란 뚜껑으로 닫아도 밀봉이 되지 않아 장기 보관을 위한 뚜껑으로써의 역할을 못 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소비자들도 가만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CJ제일제당도 이런 부분을 인정했습니다. 이 단체의 질문에 '충격완화용'이라고 답한 겁니다.
그러자 이 단체는 불필요한 플라스틱 뚜껑을 반납해 환경을 보호하자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많은 소비자가 공감했고 실제로 스팸 뚜껑들이 모여 CJ제일제당으로 보내졌습니다. 소비자들의 의견이 모아지자 CJ제일제당도 이에 응답합니다. CJ제일제당은 식품을 생산하는 생활 밀착형 기업입니다. 소비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결국 CJ제일제당은 올해 노란 뚜껑 없는 스팸 선물 세트를 내놨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팸은 참 오랜 기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네요. 재미있게 보셨나요? 앞으로 이어질 [결정적 한끗]에는 더욱 재미있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스팸하면 떠올랐던 '짠맛'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는 물론 스팸 맛의 비밀을 여러분들에게만 살짝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참! 우리나라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마케팅 비법도 소개해드릴게요.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