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국내 대형마트 사이에서 '가격 경쟁'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시작은 이마트였습니다. 당시 이마트는 일부 생활필수품을 최저가로 판매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혹여 경쟁사가 가격을 따라 내리면 단돈 10원이라도 더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경쟁사들도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합니다. 롯데마트와 홈플러스는 '우리도 10원이라도 더 싸게'를 선언하며 맞불을 놨습니다.
사실 이 경쟁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서로 최저가를 책정하다 보면 이론적으로는 제품 가격이 0원이 돼야 끝나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해당 업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을 되찾고 경쟁을 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사보다 무조건 싸게 팔겠다고 외치는 걸 그만두고 독자적인 상품 경쟁력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선회했습니다.
'극단적인' 가격 경쟁은 유통 업체들에 많은 교훈을 줬습니다. 일단 자사의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품을 만들어 유통 업체에 공급하는 제조사들의 불만도 컸고요. 그렇다고 해서 경쟁사들을 압도하지도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생각보다 가격에 민감하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공급자와 수요자의 사이의 생각의 괴리가 얼마나 큰 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죠.
물론 소비자가 가격이 비싼 점포를 굳이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다만 10원 더 싸다고 해서 꼭 그 점포를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대체로 저렴한 데다가 품질도 좋다는 인식이 있으면, 거부감 없이 장을 보곤 합니다. 결국 유통 업체들은 '기싸움'을 하느라 소비자들이 진짜 원하는 걸 놓쳤던 셈입니다. 경쟁을 위한 경쟁을 하다 보니 얻는 것은 없이 출혈만 컸습니다.
요즘 유통 업체들의 '배송 경쟁'을 보면 10년 전 가격 경쟁이 떠오릅니다. 최근 국내 유통 업계의 최대 화두는 '퀵커머스'입니다. 온라인 쇼핑의 배송 속도가 익일 배송에 이어 당일 배송, 새벽 배송으로 빨라지더니 이제는 아예 30분 배송, 즉시 배송이 당연한 듯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속도가 유통업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퀵커머스 시장은 음식 배달앱 업체인 배달의민족이 'B마트'라는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자들이 앱을 통해 생필품을 주문하면 1시간 안에 배달해 주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수요가 많지 않으리라 예상됐지만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B마트의 지난해 매출액은 1450억원으로 주문 건수는 1000만건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러 업체가 퀵커머스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쿠팡은 '쿠팡이츠 마트'라는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GS리테일과 BGF리테일 등 편의점 업체들도 줄줄이 '퀵커머스' 서비스를 내놓고 있습니다.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 대형 유통 업체들 역시 기존 오프라인 점포 등을 활용해 1시간 내 배송 서비스를 시작했거나 준비하고 있죠. 이제 '즉시 배송'은 유통 업체의 필수 서비스가 돼가고 있습니다.
퀵커머스에 대한 수요는 지속해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글로벌 배달앱 업체인 딜리버리히어로는 전 세계 퀵커머스 시장 규모가 오는 2030년이면 600조원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비대면 소비가 일상화하면서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퀵커머스로 받는 수요 역시 늘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유통 업체들의 이런 경쟁이 다소 과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과거 가격경쟁 때처럼 얻는 것 없이 출혈만 커지는 경쟁이 될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퀵커머스에는 많은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배달원은 물론 도심 곳곳에 물류 센터를 마련해야 하니 막대한 규모의 투자가 불가피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소비자들은 이렇게나 빠른 배송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너도나도 가격을 낮추면 소비자들의 가격 민감도는 떨어진다고 합니다. 대체로 어딜 가도 저렴하니 가격에 따라 특정 업체를 찾지는 않게 된다는 의미죠. 배송 속도도 이쯤 되면 소비자들의 민감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다들 빨리 배달해 주는데 굳이 특정 업체를 콕 집어 찾을 필요가 없는 거죠.
국내 배송 속도 경쟁에 불을 댕긴 건 쿠팡의 '로켓 배송'입니다. 로켓배송이 처음 론칭했을 당시 주문 다음날 물건이 배송되는 경험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마켓컬리가 신선식품 '새벽 배송' 서비스를 선보인 것도 배송 시장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로켓 배송이나 새벽 배송은 단순히 속도만으로 인기를 끌었던 건 아닙니다.
로켓 배송의 경우 '쿠팡맨'을 내세워 전에 없던 '친절한 택배 서비스'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았습니다. 마켓컬리도 강남 지역에서 '프리미엄 신선식품을 선별해 배송해 준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에 배송도 빠르니 매력이 있었던 겁니다. 쿠팡도 마켓컬리도 그들만의 고유한 '스토리'가 있었던 겁니다. 외형적으로는 빠른 배송, 새벽 배송이 눈길을 끌었지만 그 안에는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담겨있었습니다.
반면 요즘 주목받고 있는 퀵커머스에는 쿠팡이나 마켓컬리와 같은 스토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속도만 보입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너도나도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속도가 퀵커머스의 전부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속도는 물론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속도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핵심은 '내가 너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줄 수 있느냐입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쿠팡과 마켓컬리가 이미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줬습니다. 현재 퀵커머스에 뛰어든 업체들이 속도에만 매몰된 채 쿠팡과 마켓컬리의 그것과 같은 서비스만 제공한다면 소비자들은 외면할 것이 뻔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가격 민감도가 확 떨어지겠죠.
퀵커머스 업체들은 이런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속도만 남아서는 안됩니다. 소비자들이 우리를 선택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우리만의 특별함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갖춰졌을 때 '롱런'할 수 있을 겁니다. 소비자들은 지켜볼 겁니다. 누가 어떤 서비스를 내놓을지를 말이죠. 배송 속도 경쟁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퀵커머스 시장이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변화할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