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대 쇼핑 축제 블랙프라이데이(블프)를 앞둔 국내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고환율의 여파로 해외 직구의 최대 강점인 '가격 경쟁력'이 의미를 잃고 있어서다. 예년 같으면 블프 직구법과 상품 등이 활발히 공유될 시기지만 사뭇 차분한 분위기다. 높아진 가격에 직구를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 업계서도 이번 블프의 영향력이 예년보다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힘 빠진 블프'가 국내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연말 직구 수요가 국내에 몰릴 수 있다는 기대다. 명품과 가전제품 등이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 관건은 국내 기업들이 얼마큼의 할인율을 내걸 수 있느냐다. 이 기회를 활용하면 직구에 뺏겼던 소비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신세계와 롯데 등은 이를 겨냥 대대적 할인 행사를 기획 중이다.
'블프' 김빠지나
14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분기(4월~6월) 온라인쇼핑 해외직구 규모는 1조3021억원으로 1분기보다 5.1% 줄었다. 특히 미국 해외직구액은 5123억원으로 7.6% 감소했다. 이른바 '킹달러'의 여파다. 지난 2분기는 1200원대였던 달러/원 환율이 1300원대로 치솟았던 시기다. 해외직구액 추이는 블프 흥행의 가늠좌다. 보통 하반기로 갈수록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기세가 꺾인 셈이다.
현재 달러/원 환율은 1429원을 기록하고 있다. 환율이 1400원대를 돌파한 것은 금융위기 당시였던 지난 2009년 이후 13년 5개월 만의 일이다. 환율은 해외 직구에서 절대적이다. 환율이 1400원으로 올랐다면 1달러의 가치가 1400원으로 올랐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블프에 대한 소비자 기대감도 예전만 못한 분위기다. 보통 10월이 되면 직구족들은 블프 직구법과 사이트 등을 공유하며 '대목 맞이'에 나선다. 하지만 올해는 이 같은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업계서도 연말 블프 직구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고환율에 직구를 해도 국내 판매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직구는 해외 배송에 따르는 번거로운 문제가 많다. 반품도 어렵고 배송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건의 파손이나 분실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굳이 직구라는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군불' 지펴라
이커머스 업계는 '직구' 심리 띄우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직구는 이커머스 업계가 새 먹거리로 점찍은 중요 사업이다. 하지만 최근 고환율로 빨간불이 켜졌다. 업계에선 할인 행사로 군불 지피기가 한창이다. 목표는 다가오는 블프 대목 살리기다. G마켓은 이달 23일까지 '숨참고 직구 다이브' 할인 행사를 열고 미국, 유렵, 호주 등 지역의 직구 상품을 판매한다. G마켓은 본격적인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인 11월 더 큰 규모의 직구 행사도 기획해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아마존과 손을 잡은 11번가도 공세에 나섰다. 오는 17일까지 매일 할인 쿠폰을 제공하는 '프리 블랙 프라이데이'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서울 홍대에 해외 직구 물품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아마존 팝업스토어'까지 열었다. 롯데온은 환율 변동 최소화에 나섰다. 10월 한 달간 '해외직구 세일 위크'를 열고 몽클레르, 바버, 구찌, 버버리 등 브랜드의 상품을 내놓는다. 롯데온은 "사전에 자주 구매하는 인기 상품들의 재고를 미리 확보해 가격을 낮췄다"고 설명했다.
이런 노력에도 직구 수요가 활기를 되찾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커머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치솟은 환율 탓에 직구 했던 물건을 환불하면 차익이 발생할 정도"라며 "할인을 제공한다고 해도 기존 가격을 유지하는 수준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어 "국내에 출시되지 않았거나 재고가 없는 상품을 구하는 직구족을 '타겟팅'하는 전략이 앞으로 중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엔 호재?
이처럼 김빠진 블프가 국내 연말 세일에 호재로 작용할지도 주목된다. 그동안 연말 세일은 블랙프라이데이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외 직구가 크게 늘면서 국내 유통업체의 매출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연말마다 적지 않은 돈이 아마존 등 해외 유통사로 빠져나갔다. 정부는 이를 맞대응하기 위해 '코리아세일페스타'(코세페) 행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블프에 미치지 못하는 낮은 할인율과 저조한 기업 참여도로 '관제 행사'라는 오명을 낳았다.
블프의 '빈틈'은 국내 기업에 충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해외 직구 수요가 국내로 유턴할 수 있다. 국내 유통·제조사들은 대대적인 할인 공세를 계획 중이다. 신세계그룹은 2019년부터 전 계열사가 참여하는 연중 최대 쇼핑 행사 '쓱데이'를 연말마다 열고 있다. 반값 한우 등 상품이 인기를 끌었다. 올해 행사는 이달 31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롯데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올해 처음으로 온·오프라인 유통 채널을 망라한 대규모 쇼핑 행사 '롯키데이'를 열 예정이다.
관건은 국내 기업들의 얼마큼의 할인율을 보일 수 있는가다. 물론 국내 상황도 어렵다. 불황에 소비심리는 얼어붙고 있다. 원부자재 인상에 물가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이 때문에 높은 할인율을 내세우기 어려울 것이란 의견도 많다. 다만 이번 기회를 잘 사용하면 해외로 달아난 소비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어려움을 떠안더라도 소비자 심리를 저격할 강력한 '한방'이 필요한 셈이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고환율로 해외에 가도 여행만 하고 오는 소비자들도 늘고 있다"며 "블프의 위축은 국내 연말 행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연말 선물 등 고가 상품의 수요가 국내로 몰릴 수 있다"며 "유통·제조사의 협업도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기존보다 높은 할인율이 나올 수 있다.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관건 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