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6위 롯데그룹이 흔들리고 있다. 롯데그룹의 한 축을 담당하던 케미칼 사업 부진에 그룹의 근간인 유통 사업마저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유동성 위기설에 휩싸였다. 롯데그룹은 진화에 나섰지만 업계와 시장의 우려는 여전하다. 이에 롯데그룹 위기설의 시작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롯데그룹의 노력 그리고 롯데그룹이 그리고 있는 미래에 대해 짚어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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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는 기업도 그 자리에서 10년을 버티기는 쉽지 않다. 우리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은 도전자들의 패기에 곧 따라잡힌다. 10년이 아니라 100년을 생각해야 하는 그룹 오너의 어깨는 더 무겁다. 세상의 모든 오너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외치는 이유다.
롯데는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이 1948년 일본에서 껌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뒤 크게 두 차례 변신에 성공하며 지금의 재계 5위권 그룹으로 성장했다. 첫 번째는 유통 사업으로의 진출이다. 롯데는 70년대 제과와 음료업의 호황에 힘입어 호텔과 쇼핑업에 진출했다. 지금 롯데그룹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유통업이다.
또 하나의 기둥인 화학군도 시작은 1970년대지만 유통·식품군에 비해 중요도는 낮았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KP케미칼, 현대석유화학, 타이탄케미칼, 삼성정밀화학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성장동력을 잃은 식품·유통군을 대신할 사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화학사업까지 위기에 처하면서 롯데그룹은 다음 먹거리에 대한 고민이 깊다. 이에 따라 롯데는 2023년 말 헬스앤웰니스·모빌리티·지속가능성·뉴라이프 플랫폼 등 이른바 '4대 신성장 테마'를 확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신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향후 5년간 37조원을 투자해 '뉴 롯데'를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신동빈 회장은 물론 후계자인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 겸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 부사장도 지난해와 올해 연속으로 미국에서 열린 CES에 참석해 롯데이노베이트의 메타버스 플랫폼 칼리버스 등을 살펴보는 등 주요 신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4대 신사업+AI
'바이오앤웰니스'는 4대 테마 중에서도 롯데가 가장 공들이는 부문이다. 이 분야의 중심인 롯데바이오로직스는 현재 인천 송도에 3개의 메가 플랜트를 조성 중이다. 각 플랜트당 12만ℓ 규모의 항체 의약품을 생산하는 총 36만ℓ 규모의 시설이다. 오는 2030년 완공되면 글로벌 톱10 바이오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모빌리티' 분야는 롯데이노베이트(전 롯데정보통신) 담당이다. 롯데이노베이트의 주력 사업인 전기차 충전기 이브이시스(EVSIS)는 올해 CES2025에서도 부스를 차렸다. 지난해엔 전기차 충전기 생산을 위해 미국에 '이브이시스 아메리카'를 설립하고 북미 전기차 충전 시장에 진출했다. 롯데이노베이트는 국책사업인 '한국형 차량간통신(V2V) 자율주행차' 사업에도 참여, 운전자가 필요 없는 레벨 4 자율주행을 구현했다.
롯데이노베이트는 또다른 4대 신성장 사업인 '뉴라이프 플랫폼'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오픈한 초실감형 메타버스 '칼리버스'를 통해서다. 이번 CES2025에서는 별도 VR기기 없이 3D필름을 통해 메타버스의 3D환경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또 엔비디아, 메타, 아비트럼, 화이트스톤 등과 협력하기로 하는 등 생태계 확장에 나서고 있다.
모든 신사업이 '파란불'인 것은 아니다. 핵심 신성장 사업이었던 헬스 부문을 맡은 롯데헬스케어는 지난해 말 법인 청산을 결정했다. 주사업인 디지털 건강관리 플랫폼 '캐즐'도 사업을 종료했다. 메타버스 사업은 엔데믹 이후 글로벌 시장의 흐름이 하락세다.
또다른 4대 신사업 중 하나인 '지속가능성' 분야를 맡은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구 일진머티리얼즈)는 그룹 유동성 위기의 주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일진머티리얼즈 인수에 사용한 2조7000억원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인수 후 실적도 악화했다. 다만 올해부터는 수익성 높은 AI반도체용 고급 동박·테슬라의 차세대 배터리용 동 납품을 시작하는 만큼 장기적으로는 '신성장 사업'에 걸맞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신사업을 포괄하는 게 AI다. 신 회장은 그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AI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2023년 7월 VCM에서 신 회장은 "AI기술은 과거의 PC, 인터넷, 모바일처럼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며 AI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지난해 신년사와 상반기 VCM에서도 "업무 전반에 AI 수용성을 높이고 생성형AI 등에 기술 투자를 강화해 달라"며 AI는 업무 효율화 수단이 아니라 본원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봄엔 '2024 LOTTE CEO AI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4대 신성장 사업에 AI를 접목할 방법을 요구했다.
업계에서는 저수익·저성장 산업인 식품·유통 의존도를 낮추고 고수익·고성장 3차 산업으로 중심을 전환하는 신 회장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1, 2차 산업에 무게중심을 뒀던 롯데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그룹의 명운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수십년간 유지해 온 기존 사업 대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전략"이라면서도 "천천히 도태되는 것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새 길을 찾는 게 오너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위기의 롯데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