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2회째를 맞는 게임전시회 지스타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게임 산업에 미칠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를 새삼 가늠하게 해준 자리이기도 했다. 일본의 소니와 대만의 HTC가 내놓은 기기 및 콘텐츠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생생하고 몰입감이 높아 관람객의 찬사를 받았다. 모바일과 온라인 장르에 머무르고 있는 토종 업체들이 세계적 물결인 가상현실에 자칫 뒤처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만 하다.
가상현실에 대한 높은 관심은 전시장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지스타조직위원회는 소니와 B2C관 내 40부스 규모의 특별관을 공동으로 마련했다. 지스타에 전용 공간을 따로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 소니는 지스타 조직위원회와 공동으로 가상현실 전용관을 꾸리고 관람객이 게임 타이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
소니는 지난달 국내에서 발매한 가상현실 기기 '플레이스테이션(PS) VR' 및 관련 콘텐츠들을 대거 선보였는데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웠다. 출시 전부터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제품이 지스타에서 데뷔전을 치른데다 총 11종의 유명 게임들을 즐길 수 있어 관심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체험한 관람객들 사이에선 "이 정도로 생생할 줄 몰랐다", "제품을 당장 사고 싶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소니는 한쪽에서 '플레이스테이션 VR'을 50대 한정 판매하기도 했는데 50만원대라는 적지 않은 금액임에도 곧바로 동이 났다. 소니 관계자는 "이달에 국내에 정식 발매했으나 워낙 수요가 많아 시중에 물건이 없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기자가 몇몇 게임들을 체험해보니 가상현실의 매력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언틸 던: 러시 오브 블러드'란 공포 게임은 이용자가 기차길을 타고 달리며 좀비나 괴물들을 향해 총을 쏘는 슈팅 장르다. 기대했던 것보다 입체감과 사실감이 뛰어났다. 어둡고 공포스러운 배경에서 갑자기 괴물이 튀어 나온다거나 롤러코스터처럼 급강하할 때 몸이 반응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정글탐험보트를 타고 이동할 때의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임을 체험할 때는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했으나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픽이나 조작법 등이 세련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게 됐다. 소니의 VR 기기는 머리에 착용하는 방식인데 여기에 이어폰을 끼고 조이스틱을 손에 대니 몰입감이 증폭됐다.
소니와 함께 가상현실로 두각을 나타낸 업체가 대만 HTC다. 마침 HTC는 지스타에서 가상현실 헤드셋 '바이브'를 국내 시장에 출시한다고 밝혔다. 바이브는 HTC가 글로벌 게임사 밸브와 손잡고 개발한 것으로 플레이스테이션 VR에 이어 국내 시장에 두번째로 나온 제품이기도 하다.
이 제품 가격은 125만원으로 일반인이 선뜻 구매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HTC는 일반 소비자보다 이른바 'VR방'과 같은 전문 상업시설을 공략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HTC는 스크린 골프 업체 골프존과 협업을 통해 골프존의 모션 캡쳐 및 분석 기술을 이용한 콘텐츠 개발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울러 제이씨현시스템이란 유통업체와 협력해 판매 및 관리 서비스(AS) 지원을 받기로 했으며, 부산시와 VR 생태계를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도 공동 추진키로 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에 비해 국내 게임사들은 모바일과 온라인 장르에서 벗어나지 못해 대조를 이뤘다. 가상현실 분야에선 손을 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요 참가 업체인 넥슨과 넷마블게임즈, 웹젠 등은 출시를 앞둔 모바일 신작을 대대적으로 내걸긴 했으나 가상현실 게임은 전무했다. 엠게임이 테스트 버전을 들고 나오긴 했으나 야외 광장에 설치된 부스에 전시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국내 게임사 가운데에선 로이게임즈가 선보인 소니 VR 전용 '화이트데이:스완송'이 주목을 받았다. 이 게임은 미로를 탈출하는 호러 장르인데 실감나는 사운드와 그래픽으로 마치 공포영화 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가상현실 분야에선 대형사보다 로이게임즈 같은 중소 업체들의 약진이 도드라졌다.
가상현실은 증강현실(AR)과 더불어 미래 게임 산업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디지털 전문 컨설팅업체 디지 캐피털에 따르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시장은 오는 2020년까지 약 15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 게임사 가운데 드래곤플라이와 한빛소프트, 조이시티 등이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하고 있으나 소니와 HTC 등에 비해선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한 게임업체 관계자는 "게임 산업은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대세가 바뀔 수 있다"라며 "국내 게임사들 대부분 스마트폰용 모바일에 역량을 모으고 있어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한 가상현실 기기와 콘텐츠가 밀려오면 사실상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