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개봉한 영화 '상류사회' 이야기를 꺼내보겠습니다. 배우 박해일 씨와 수애 씨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개봉 전 꽤 주목받았지만 노출 영화로만 관심을 끌었을 뿐 흥행엔 실패했는데요. 손익분기점인 200만명의 절반도 넘기지 못하고 76만 관객에 그치면서 배우가 아깝다는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죠.
비평가들은 불필요한 베드신과 현실성 없는 엔딩을 질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여름 당시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을 정확히 짚어냈고,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를 담은 영화로 기억됩니다.
영화는 한 방송국의 시사 토론 프로그램 녹화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이날의 토론 주제는 '젠트리피케이션, 해결책은 있는가?'고요.
토론에 참석한 자영업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장 임대료를 못 내게 생겼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라고요?" 이에 대해 국회의원은 곧 자영업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치죠.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 경제학 교수인 장태준(박해일 분)은 "임대료를 내야죠. 건물주가 무슨 죄인입니까. 왜 임대료도 못올리게 합니까."라고 합니다. 토론 참석자들은 모두 당황하고 맙니다.
장 교수는 "세입자는 시민입니다. 하지만 건물주도 시민입니다. 물론 돈이 더 있고 덜 있고 차이지만, 양쪽 다 보호받아야 하는 시민입니다. 공존하고 상생하는 걸 목표로 해야죠."라고 말하죠. 우리 사회에서 세입자는 피해자, 건물주는 가해자로 보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반박해 다시 한번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더군요.
일단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뭔지부터 살펴보고 누구 말이 맞는지 생각해볼까요.
젠트리피케이션은 상류층을 뜻하는 젠트리(gentry)에서 파생된 용어로, 1964년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당시 런던 서부에 위치한 첼시와 햄프스테드와 같은 하류층 주거지역이 상류층이 유입되면서 고급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고, 기존 하류층은 주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지역에서 쫓겨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요. 한 지역이 상류층에 의해 탈바꿈하고 구성원이 뒤바뀌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최근 몇년 간 한국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홍익대학교 주변 홍대앞 거리, 경리단길, 경복궁 근처서촌과 북촌, 상수동 등인데요.
이 지역은 다소 낙후되고 임대료가 저렴한 지역이라 언제부턴가 소상공인들이 이 지역에 분위기 있는 까페와 식당, 공방, 갤러리 등을 차리기 시작했고요. 입소문을 타고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상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에는 자본이 유입돼 대형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대거 입점하며 상업지구로 변모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존의 소규모 점포 상인들은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죠. 결국 남는 것은 대형 프랜차이즈뿐입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볼까요. 임대료 폭등을 참지 못한 소상공인들은 국회 앞 집회를 엽니다. 집회 현장에 현수막들을 둘러보면 '굶주리는 국민! 정부가 책임져라!', '양심 없는 상권에 미래는 없다!', '임대료 폭등! 임대차보호법 개정하라!' 등의 문구가 쓰여 있네요.
TV 뉴스 한 장면도 나옵니다. 인터뷰한 자영업자는 "아무리 조물주 위의 건물주라지만 도저히 이 월세 내면서 장사를 할 수가 없어요."라고 토로하죠.
국회 앞 집회 현장에 참석한 장 교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식당 주인 할아버지에게 라이터를 빌려줬는데요. 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분신자살을 시도합니다. 이 같은 장면은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실제로도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자살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한 자영업자들이 존재합니다.
분신자살 시도 노인을 살리면서 장 교수는 뜻밖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고요. 그동안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장했던 시민은행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웁니다.
세입자를 보호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건물주를 옥좨선 안된다는 거죠. 건물주라고 다 같은 건물주가 아닌데, 이제서야 땅값 올라서 임대료를 올리겠다는데 그 권리마저 막으면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내놓은 대안이 시민은행인데요. 정부가 시민은행을 만들고 저금리의 장기대출 상품을 만들어서 소상공인들이 임대료를 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민은행은 현실 가능할까요. 아주 똑같은 모델은 아니지만 지금도 정부가 정책적으로 은행을 통해 소상공인 경영 안정자금 지원을 하고 있어 소상공인 특례보증 대출에 한해 저금리를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일부 지역에선 장기안심 상가조성 지원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상가 건물 임대인이 5년 이상 임대료 안정화에 대해 임차인과 협약하면 건물 수리비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무조건 임대료 인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상생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는 건데요. 현재로선 정부의 현실적인 지원 정책, 특히 특별법 제정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향후 해당 지역 주민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된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정적인 면보다 낙후된 지역을 살리는 긍정적인 면이 부각될 수도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