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계가 담합 과징금 때문에 술렁이고 있습니다. 조만간 사상 최대 규모의 호남고속철 담합 '과징금 폭탄'이 떨어진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건설사들에 떨어진 과징금 규모는 5000억원에 육박하고, 올해 안에 1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설업계에서는 이런 목소리도 나옵니다. "담합은 정부가 묵인·조장한 것이다." 애초에 정부가 사업을 발주할 때부터 경쟁이 불가능하게 해놓고 '왜 우리 탓만 하느냐'는 얘기입니다. 특히 4대강 사업 담합사건에 대한 한 건설사의 항변이 과징금 때문에 술렁이는 건설업계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건설업계의 항변을 고스란히 담은 이 사건의 판결문을 통해 건설사들 사이에 담합이 이뤄졌던 과정과 이에 대한 건설사들의 입장, 또 사법부의 판단을 들여다 봤습니다.
◇ 4대강 담합의 전말(顚末)
이 사건은 지난 2009년 있었던 4대강 사업 1차 턴키사업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16개 공구(선도사업 1개 공구 포함) 입찰 당시 건설사들이 '나눠먹기'식 부당 공동행위를 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우선 4대강 사업에서 건설사들이 공동행위를 한 '팩트'를 인포그래픽을 통해 살펴보시죠. 공정위와 건설사들의 판단과 주장에서 사실관계를 종합해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제2행정부)가 정리한 '16개 건설사의 지분율 합의'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
대형 건설사들은 2007년 말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명박 후보가 당선인이 된 시기에 민자사업인 대운하 사업을 위해 그룹별로 공동 사업 컨소시엄을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대운하사업을 접고 2008년 6월 재정사업인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전환하자 컨소시엄을 구성했던 건설사들은 대운하 사업 때 조율해 합의한 지분율을 바탕으로 4대강 사업을 나눠 맡기로 했습니다.
이 건에 대해 2012년 공정위는 8개 대형 건설사(대림산업·현대건설·GS건설·SK건설·삼성물산·대우건설·현대산업개발·포스코건설, 과징금액 순)에 담합, 정확히 말하자면 '부당한 공동행위의 금지를 규정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위반'행위판정을 내렸습니다. 총 11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이 부과되고 정보교환 금지 등의 시정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8개사 모두 공정위를 상대로 제재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걸었지만 유독 삼성물산의 항변 내용이 수위가 높았습니다. 다른 건설사는 "경영 악화를 고려해달라", "국책 사업 수행에 일조한 점을 참작해달라"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이 건설사는 '청와대의 지시'까지 거론한 항소장을 올려 공정위에 맞섰기 때문입니다.
◇ 건설사의 입장(立場)
삼성물산의 항소심 법률 대리는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태평양이 맡았는데요. 항소 이유를 통해 부당행위 금지, 과징금 부과, 시정명령 등이 모두 위법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을 들여다 볼까요?
판결문에 따르면 태평양은 "원고(삼성물산) 등 16개사가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대운하 사업에서의 컨소시엄을 4대강 사업에서도 유지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는 이렇습니다.
"발주처는 낙동강 6개 공구에서 건설사 별로 1개의 공구에만 입찰하도록 공고했으며, 2009년 당시 대규모 수자원 턴키 공사를 시공·설계할 능력이 있는 건설사 및 설계회사는 10개 이내에 불과했음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4대강 공사를 마칠 수 있도록 15개 공구를 동시에 발주함으로써 건설사들로 하여금 이 사건 공동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거나 묵인했다."
태평양은 "정부는 4대강 사업과 관련해 건설사들의 공사에 광범위하게 개입했고 건설사들은 정부의 이와 같은 지시에 따라 입찰에 참여한 것"이라며 "이 사건 공동행위는 발주처의 의사 혹은 정부의 행정지도에 따른 것으로서 부당성이 없다"는 논리를 폅니다. 오히려 공정위의 제재가 법에 어긋난다는 주장입니다.
과징금 납부 명령에 대해 공정위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에서도 정부 책임론을 제기합니다.
"원고는 정부 주도의 대운하 사업 추진을 위해 막대한 규모의 운영분담금을 지급했다가 정부의 일방적인 중단 발표로 고스란히 손실을 봤고, 이 사건 공동행위로 인해 원고가 얻은 부당한 이익이 거의 없다. (중략) 정부는 15개 공구를 동시에 발주해 공구분할이 불가피한 상황을 조성했다. 나아가 정부는 원고 등 8개사의 이 사건 공동행위 사실을 알면서도 신속한 공사 시공을 위해 이를 묵인·조장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건설사들이 4대강 사업 지분을 협의하고 배분한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제재를 받을 수 없다는 게 이 건설사 변호인 측의 논리입니다.
◇ 법원의 판단(判斷)
이런 건설사의 주장에 대해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항변은 '이유 없다'는 게 서울고법의 판단입니다. 공정위의 담합 판단과 제재가 법적으로 옳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재판부도 정부가 담합을 부추긴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대목이 있어 곱씹어볼 만합니다.
"①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사업으로 변경하고도 추후 운하 추진에 지장이 없도록 '4대강 살리기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그 과정에서 경부운하 설계자료를 제공받거나 대운하 설계팀과 4대강 준설, 보 설치계획 등을 협의한 사실 ②건설업계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2011년 말에 준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꺼번에 많은 턴키공사를 일시에 발주하고 낙동강 6개 공구는 업체별 1개 공구만 참여하도록 제한한 사실"
재판부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정부와 발주처가 공동행위를 유도하는 행정지도를 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행정기관이 법령상 구체적 근거 없이 사업자들의 합의를 유도하는 행정지도를 한 경우에 사업자로서는 독자적으로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여 행동하여야 하는 점 (중략) 국토해양부나 발주처의 행정지도가 이 사건 공동행위를 촉발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공동행위는 공정거래법 제19조 제1항 제3호의 '부당하게 용역 거래의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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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합 논란'의 끝은?
재판부의 결론까지 살펴봤지만 수긍이 안 가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국토부가 공정거래법을 무시하고(구체적 근거 없이) 건설사들의 합의를 유도했다고 하더라도, 건설사들은 "이건 공정거래법에 어긋나니 응하지 못하겠다"고 항거했어야 한다는 얘긴데요.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건설사들을 보는 눈은 여전히 따갑습니다. 인터넷에는 "담합을 저지르고 국민의 혈세를 부당이익으로 가져간 건설사들이 정부를 탓하는 건 뻔뻔하다"는 비난의 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건설업계에서는 "삼성이 할 말을 했다. 다른 건설사들이 그런 말을 못하고 있는 게 오히려 잘못된 것"이란 얘기도 있습니다.
삼성물산은 지난 달 나온 이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를 준비중입니다. 건설사들에게 부과된 담합 관련 제재는 올해만 10건, 과징금 규모는 3234억원에 달합니다. 건설업계 담합 논란의 시발점이 되다시피한 '4대강 담합 사건'이 어떻게 결론 내려질지, 또 그 뒤에 내려진 담합 판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