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상반기 [재계 3·4세]시즌1을 통해 17개 대기업 경영권 승계 과정과 자금출처, 경영능력을 분석했습니다. 같은해 하반기 시즌2에서는 우리나라 주요산업 중 가장 오랜 업력을 가진 제약업종의 승계과정을 15개 회사를 통해 들여다봤습니다.
이번 시즌3의 주제는 건설·부동산입니다. 국토교통부가 올해 7월 발표한 토목·건축 시공능력평가 50위내 건설사와 상위권 건설자재업체 가운데 2세 또는 3세 체제로 전환 중인 곳들을 살펴봅니다. 이들 회사의 창업주는 특정지역을 기반으로한 소규모 회사로 출발해 대기업계열 회사들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며 보란 듯 전국구로 승격했습니다. 최근엔 주택시장 침체기의 돌파구로 골프장·리조트를 공격적으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는 은둔형 기업이라는 오명, 계열회사끼리 일감몰아주기로 의심받는 사례 속출 등 어두운 모습도 있습니다. 같은 그룹 안에 oo건설, oo주택, oo개발처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소규모회사도 많은데요. 단순히 문어발식 확장 형태가 아니라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싼값에 토지를 확보해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란 의혹도 받습니다. 중견건설사, 건설자제업체 지배구조분석을 통해 화려한 외형 그 이면을 들여다봅니다.[편집자]
삼표그룹의 뿌리는 1952년 설립된 강원탄광이다. 고(故) 정인욱(1912~1999) 창업주가 강원도 철암 골짜기에 탄광개발업체 강원탄광을 설립했다. 석탄은 1960~1970년대 우리나라가 가진 유일한 에너지원이었기에 강원탄광의 사업도 빠르게 자리잡았다.
강원탄광은 자체 생산한 무연탄을 직접 가공하기 위해 1963년 서울근교에 연탄공장 3개를 짓고, '삼표연탄' 신화를 알렸다. 1966년 삼표연탄 수송을 위해 삼강운수(현 삼표의 전신, 삼표그룹 공식홈페이지는 삼강운수를 모체로 설명)를 만들었다. 1960년대 중반 강원탄광은 강원산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골재·레미콘 등으로 사세를 넓혔고, 1970년대엔 철강사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엔 재계 26위로 30대그룹 반열에 올랐다. 그 시절 강원산업그룹은 국내 전기로 3위 강원산업, 콘크리트파일·레미콘업체 삼표산업, 철강재 유통판매 삼표상사, 산업기계생산 삼표제작소 등 29개 계열사를 거느렸다.
그러나 무리한 철강분야 증설이 외환위기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면서 그룹 돈줄은 바닥을 드러냈고 급기야 30대그룹 진입의 '삼페인'을 온전히 들이키지도 못한 채 주력계열사들이 워크아웃에 돌입하는 시련을 맞았다. 그 무렵 창업주가 타계했고, 창업주 2세 중 장남 정문원씨는 강원산업을 사돈집안인 현대차그룹 계열의 인천제철에 매각하고 재계를 떠났다. [☞관련기사 사라진 강원산업]
다만 강원산업그룹이 외환위기 격랑에 길을 잃었을 때 창업주의 차남 정도원 회장이 이끈 삼표 계열은 명맥을 이어갔다. 2000년대 초반 수도권 아파트 경기가 살아나면서 레미콘·골재 산업 위주의 삼표는 워크아웃 졸업과 함께 순풍에 돛 단 듯 성장했고, 현재 삼표산업(레미콘·골재) 삼표시멘트(옛 동양시멘트) 삼표피앤씨(콘크리트) 삼표레일웨이(철도) 등 국내계열사 27개를 가진 중견그룹으로 부활했다.
화려했던 과거의 사세와는 여전히 비교할 순 없어도 지금의 삼표는 '레미콘(굳지 않은 상태의 콘크리트)' 상위 업체로 위상을 공고히 다지며, 화려한 혼맥 그리고 최근 3세 승계를 위한 발걸음으로 주목받는다.
# 삼표 2세 정도원 회장 세자녀 중 유일한 경영참여자 정대현
삼표그룹 2세 정도원(74) 회장은 고(故) 이상순 일산실업 명예회장 딸 이미숙(63)씨와 결혼해 1남2녀를 뒀다. 첫째딸 정지선(48)씨는 1995년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장남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결혼했다. 둘째 정지윤(46)씨는 1998년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장남 박성빈씨와 혼인했다. 당시는 정도원 회장이 강원산업 사장으로 있었을 때여서 철강 집안이 사돈으로 맺어진 혼인이었다. 정 회장의 막내이자 외아들 정대현(44) 사장은 2011년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 장녀인 구윤희씨와 결혼했다.
첫째 지선씨와 둘째 지윤씨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주요 계열사 주주명부에만 이름을 올리고 있다. 3세 중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는 정대현 사장은 2006년 입사해 삼표기초소재, 삼표레일웨이, 삼표시멘트 등 여러 계열사를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2018년 초 삼표시멘트 대표이사(부사장)에 취임하며 명실상부 3세 경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나. 이듬해 3월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현재는 사장(사내이사), ㈜삼표 경영전락실장(사내이사), 삼표레일웨이 사내이사 등을 맡고 있다.
# 3세 정대현 승계의 핵심.. 이름도 생소한 '에스피네이처'
삼표그룹에서 자산 덩치가 가장 큰 곳은 삼표시멘트이지만 지주회사는 ㈜삼표다. 2013년 11월 공정거래법상 사업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삼표는 정도원 회장이 81.9% 지분으로 압도적 최대주주, 정대현 사장은 14.08%로 2대주주다. 3세 정대현 사장이 경영수업에 첫 발을 뗀지 15년. 지배구조의 핵심 ㈜삼표 지분 승계는 미완성이다.
하지만 삼표그룹 3세 정대현 사장에게는 히든카드가 있다. 착실하게 오랫동안 준비해온 3세 승계의 핵심은 삼표그룹내 또다른 계열사를 거느리는 소(小)지주회사 에스피네이처다. 이름도 생소한 이 회사의 지분 71.95%를 정대현 사장이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지분은 첫째누나(9.62%) 둘째누나(10.14%) 아버지(4.66%) 등 가족이 가졌다.
에스피네이처의 자산은 2013년 679억원에서 지난해말 5812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이 회사가 급속도로 몸집을 불려온 과정이 곧 삼표그룹이 3세 승계를 위해 달려온 발걸음이다.
에스피네이처의 출발은 2004년 만들어진 건설기계대여업체 '대원'이다. 당시 26살로 본격 경영수업을 받기 전이었던 3세 정대현 사장의 개인회사였다. 대원 자체는 외형적으로 보잘것없는 회사였지만, 그룹내 물류 일감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삼표로지스틱스를 지배하는 회사란 점이 숨은 가치였다.[☞관련기사 정대현 사장의 대원&삼표로지스틱스]
계열사 일감을 바탕으로 성장한 삼표로지스틱스는 정 사장 개인회사 대원의 기업 가치를 키운 동시에 배당수익(정대현 사장의 삼표로지스틱스 지분 30%)도 안겨줬다. '알토란' 삼표로지스틱스는 2013년 대원에 흡수됐고, 대원은 다시 ㈜대원과 신대원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대원은 삼표에 흡수됐다. 일련의 과정에서 정대현 사장은 개인지분을 ㈜삼표에 현물출자해 2대주주 지위를 차지했다.
이는 CJ그룹 등 다수의 대기업이 보여온 바와 같이 비상장 개인회사를 키워 주력회사와 합병하는 방식으로 승계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는 삼표 3세 승계의 '1단계'에 불과하다.
# 숨가쁜 흡수합병...복잡한듯 하나 공통점은 계열사 일감
㈜삼표에 흡수되지 않고 남아있던 '신대원'이 진정한 3세 승계의 핵심이다. 2013년 ㈜대원에서 분할해 만들어진 신대원은 정대현 사장이 지분 77.96%(나머지는 누나들 보유)를 가진 회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후 진공청소기처럼 계열사(사실상 정대현 사장의 개인회사)를 빨아들이며 몸집을 불렸다.
신대원은 2017년 1월 삼표기초소재를 흡수했다.(합병 후 사명을 삼표기초소재로 변경) 이 회사는 신대원(94.3%)과 정대현 사장(5.7%)이 모든 지분을 가진 회사였으니 사실상 정 사장의 개인회사끼리 합병이었다. 2018년 3월에는 남동레미콘을 흡수했다. 남동레미콘도 정대현 사장(76.17%) 개인회사였다.
2019년 1월 알엠씨(정대현 사장 지분 70%) 당진철도(삼표기초소재 100% 자회사)를 흡수했고(합병 후 사명을 에스피네이처로 변경), 두달이 지난 3월엔 네비엔(정대현 사장 지분 70%)과 경한(정대현 26.9%, 네비엔 13.49%)을 또다시 빨아들였다.
2년 여에 걸쳐 복잡하고 숨가쁜 합병 과정. 그러나 모두 정대현 사장 개인이 지배하고 있던 계열사를 합친 것이어서 정 사장의 지배기반은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잦은 회사이름 변경과 커진 몸집이다. 2013년부터 대원(feat. 삼표로지스틱스)→신대원→삼표기초소재→에스피네이처로 이어진 여러 단계의 사명 변경을 거치며 같은 기간 자산이 8.5배(679억원→5812억원) 불어났다. 매출은 58.2배(95억원→5529억원), 영업이익은 59.7배(4.6억원→275억원)으로 늘었다. 이런 회사의 지분 71.95%를 3세 정대현 사장이 가지고 있다.
사실상 개인회사나 다름없는 계열사 몇 곳을 합치는 것은 재계에서 지배구조 논란을 설명하기 위해 단골로 소환하는 단어(경영효율화)로 대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대현 사장의 에스피네이처는 경영효율화라는 단어 하나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몸집을 불려온 과정에서 필요한 영양분을 계열사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신대원부터 에스피네이처로 이어진 '주력 몸통'은 매년 연간 매출의 절반 이상을 계열사로부터 확보하며 성장했다. 합병 대상이었던 삼표기초소재, 네비엔 등도 계열사 일감을 거론하지 않고는 성장 과정을 설명하기 어려운 회사들이다.
종합하면 정대현 사장의 에스피네이처는 계열사 일감으로 성장해온 다수의 회사들을 쪼개고 붙여온 치밀한 승계 작업의 결과물이다. 계열사 일감뿐 아니라 사돈기업 현대차그룹의 일감 지원 논란도 잦았다. 이 과정에서 정 사장 본인이 독자적인 경영능력을 입증했거나 개인자금으로 지분을 매입했거나 대물림을 위한 세금부담으로 고민했던 흔적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2020년 현재 삼표그룹의 지분구조는 다음과 같다.
# 매형 정의선 수석부회장도 부러워할 승계 해법…경영능력 관건
이제 삼표그룹 3세 승계는 8부능선을 넘어섰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에스피네이처는 단순히 후계자의 '돈줄'이 아니다. 정대현 사장의 매형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의 현대글로비스와는 위상이 다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글로비스 하나로만 승계의 마침표를 찍기에 한없이 부족하지만, 정대현 사장의 에스피네이처는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계열 일감을 바탕으로 성장한 회사를 쪼개고 합쳐서 불려진 에스피네이처는 이제 아버지가 최대주주인 지주회사 ㈜삼표 주식으로 맞바꾸는 작업만 남았다. 정대현 사장이 에스피네이처 주식을 ㈜삼표에 현물출자하거나 합병하는 방식을 예상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쳐 정 사장이 아버지보다 더 많은 ㈜삼표 지분을 획득, 최대주주 지위에 오르는 순간이 승계의 완결이다.
배당수익은 보너스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정대현 사장이 에스피네이처(신대원 포함)를 통해 확보한 배당수익(세전)은 약 200억원. 이와 별도로 네비엔을 통해 얻은 배당수익도 60억원 가량이다. 이 자금은 향후 승계의 마침표를 찍는 과정 또는 이후의 4세 승계를 대비해는 과정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보인다.
삼표그룹 3세 승계의 여정을 되짚어본 과정에선 수많은 이름을 가진 계열사들이 등장한 탓에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전형적인 일감몰아주기를 통한 승계다. 지금까지 종잣돈, 아버지 지분을 직접 물려받기 위한 증여세 고민도 필요없었다. 계열사 일감이 '주연' 배당은 '조연'이다.
하지만 지분 승계의 완성이 오너일가에게는 안도감과 성취감을 선물할 수 있어도 3세 경영자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경영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직원과 주주, 더 나아가 협력사와 지역사회는 불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나라 기업의 '흥망성쇠'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