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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 신격호]②조국으로 눈을 돌리다

  • 2020.01.20(월) 17:26

껌으로 시작해 '호텔·쇼핑'으로 재벌기업 면모
허허벌판 잠실에 대규모 '롯데월드' 밀어붙여

국내 대기업 마지막 창업 1세대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문학청년이던 그는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궜다. 껌으로 시작해 식품, 유통, 화학, 건설, 제조, 금융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양국 경제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 하지만 그는 늘 경계인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큰 업적을 이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어느 곳에도 깊게 뿌리박지 못했다. 이에 비즈니스워치는 약 한 세기에 가까웠던 경계인 신격호의 삶을 시기별로 재조명하고 그가 남긴 업적과 숙제 등을 정리해본다. [편집자]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 당시 신격호 명예회장 인사말)

25년 만이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신 명예회장의 꿈은 '조국' 대한민국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꿈을 이룰 기회가 온 것은 1965년 한·일 수교로 양국 간 경제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해외 자본으로 국내 산업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런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신 명예회장은 드디어 한국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오랜 기간 한국을 떠나 있던 터라 경영이 '서투를 것'이란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다. 1967년 롯데제과를 시작으로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 롯데햄·우유를 설립하며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시작은 껌이었다. 롯데껌은 당시 서구 입맛을 앞세운 바브민트와 쥬시민트 등이 인기를 끌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롯데제과는 껌값이 2~5원에 불과했던 1967년 매출 3억 8000만원을 올렸다. 롯데는 당시 신문 광고에 '(롯데껌을) 10인에 7인은 알고 있다'라는 문구를 넣을 정도로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다.   

신 명예회장은 이때부터 이른바 '현해탄(대한해협) 경영'을 시작했다. 그룹이 점차 종합식품기업으로 면모를 갖춰갈 즈음인 1970년대 중반부터 홀수 달에는 한국,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양국의 경영을 함께 이어온 것이다.

1979년 3월 롯데호텔 개관식. (사진=롯데 그룹 제공)

롯데가 식품 기업에서 '재벌 기업'으로 성장한 첫걸음은 지난 1973년 롯데호텔을 설립하면서다. 당시 롯데제과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기회가 됐다.

1970년 서울시의 단속으로 롯데제과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됐다. 박 대통령은 신 명예회장을 청와대로 소환했다. 파동을 무마해주는 대신 호텔롯데를 지어 경영하라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를 '일대 반전의 기회였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롯데가 이후 식품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호텔을 비롯해 건설과 석유화학, 쇼핑, 금융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며 재벌 기업으로 면모를 갖춰갔기 때문이다.

당시 소공동 국립중앙도서관 자리에 세워진 롯데호텔은 '한국의 마천루'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고층 빌딩으로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6년여 기간 동안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1억 5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롯데그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롯데백화점이다. 신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소득이 향상되면서 소비 욕구와 구매 패턴이 다양해진 반면 유통을 대표하는 백화점의 수준은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소공동 호텔 부지 부속 건물 일부를 백화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롯데그룹이 세우려고 했던 백화점은 서울시가 추진하던 도심 억제 정책에 반하는 사업이었다. 따라서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롯데백화점이 초기 '롯데쇼핑센터'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이유다. 현재 롯데그룹에서 유통을 담당하는 법인이 '롯데쇼핑'인 이유가 바로 이런 역사에 기인한다는 해석도 있다.

호텔과 백화점의 설립을 통해 롯데는 향후 관광과 유통 영역에서 사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89년 7월12일 롯데월드 개관식에서 신격호 명예회장이 축포버튼을 누르고 있다. (사진=롯데그룹 제공)

이처럼 서울 도심에 거점을 확보한 신 명예회장은 이후 강남에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곳은 송파구 잠실이었다. 1978년 율산산업이 낙찰받은 송파구 잠실동 40-1번지 일대 토지가 그곳이다. 이 부지는 율산의 부도 이후 ㈜한양이 가지고 있었다. 1981년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전두환 정부는 해당 지역에 대규모 관광위락시설 건설을 계획한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신 명예회장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전 정부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이에 신 명예회장은 전 전 대통령을 직접 찾아 독대했다. 면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정부는 신 명예회장의 사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롯데는 ㈜한양 소유의 부지를 매입해 호텔, 백화점, 쇼핑몰, 테마파크를 연계한 롯데월드 건설에 나섰다. 1985년 8월 첫 삽을 뜬 롯데월드 건설 공사는 1988년 9월에 끝났다. 올림픽을 앞두고 숙박시설이 부족한 만큼 준공을 서둘러 달라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속도전을 펼친 결과다.

이후 수 년에 걸쳐 백화점과 쇼핑몰, 실내 테마파크, 매직아일랜드 등이 차례로 해당 부지에서 개장했다. 건축면적은 7만3602㎡(2만2265평), 연면적 55만9235㎡(16만9168평)에 달하는 초대형 단일 건물인 롯데월드는 신 명예회장의 의지가 이룬 성과였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월드를 통해 한국의 관광산업은 문화유산 등 있는 것을 보여주는 단계에서 볼거리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롯데 임직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특히 잠실은 그때만 하더라도 일부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허허벌판이었다. 이곳에 대형 호텔과 백화점, 놀이시설을 짓는 것이 과연 사업성이 있겠느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밀어붙였다. 그는 "된다"라고 단언했다.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오픈을 하고 1년만 지나면 교통 체증이 생길 정도로 상권이 발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원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결과는 신 명예회장의 예상대로였다. 잠실 사거리는 교통체증을 유발할 정도로 상권이 발달했다.

신 명예회장은 기간 사업에 투자해 모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품기도 했다. 그래서 제철사업에 관심을 뒀지만 정부가 제철은 국영화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뜻을 접어야 했다. 이에 따라 신 명예회장은 지난 1979년 공기업이던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했다. 지난 2012년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바꾼 호남석유화학은 현제 롯데그룹의 중요한 한 축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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