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금융감독원 보험감독국은 하루 수십통의 항의 전화가 빗발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합니다. '보험사기 예방 모범규준' 개정을 예고한 이후부터 입니다. 금감원이 보험금 지급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고 설명한 것과 사뭇 다른 반응인데요.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 등 소비자단체는 "보험사들의 보험금 부지급 횡포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우려했죠. 금융당국은 보험사기 예방에 대해 입을 뗀 것인데 왜 보험금 부지급에 대한 걱정이 나오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 얘기를 자세히 해볼게요.
보험업계에 따르면 금감원은 보험금 누수방지 및 공정한 보험금 지급심사 가이드라인 제시를 위한 '보험사기 예방 모범규준' 개정안에 대한 의견 접수를 지난 7일 끝냈습니다. 이번 모범규준은 보험금 지급 절차 등에 있어 보험사가 따라야 할 기준을 담고 있죠.
모범규준은 보험사고 조사 대상 선정을 위한 5대 기본원칙을 새롭게 규정했습니다. ▷관련기사 : 금융당국, 실손보험금 누수 틀어막는다(2022.04.27)
이들 요건에 해당하면 보험사는 질병 치료 근거를 추가로 확보하거나 의료자문 등을 통해 보험사기 조사에 나설 수 있게 되죠. 여기서 구체적인 정황이 발견되면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고 수사 의뢰 등 조치에도 나설 수 있고요.
'이현령비현령' 식 기본원칙
소비자단체는 이번 모범규준에 대해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을 거절 또는 지연하고 보험소비자를 보다 손쉽게 보험사기 대상자로 지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지적합니다. 또 5대 기본원칙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보니 보험사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고, 되레 분쟁만 키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죠.
기본원칙 가운데 '비합리적인 가격'과 '과잉진료 의심 의료기관' 항목이 특히 그렇습니다. 금융당국은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진료비용이 합리적인 사유없이 공시가격보다 현저히 높은 경우'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죠.
과잉진료 의심 의료기관의 경우 금감원은 '원거리 지역 환자 비중 50% 초과'를 예시로 들었죠. 브로커와 결탁해 실손보험 환자들을 모집하는 원정의료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런데요. 소비자 입장에서 바꿔 말하면 과잉진료와 무관하게 우수한 의료진이 많은 지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겁니다. 건강보험공단의 '2020 지역별 의료이용 통계연보'를 볼게요. 서울은 전체 진료비 14조9000억원 가운데 58%인 8조7000억원이 다른 지역 환자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진료받는 타지역 환자가 보험사기 대상자로 지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의료자문 후 보험금 부지급 늘었는데…
금소연은 "핵심은 보험사 의료자문 행위에 대해 금감원이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의료자문은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심사나 손해사정 업무에 참고하기 위해 의료기관에 소속된 전문의 등에게 의학적 소견을 묻는 행위를 뜻합니다. 금소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손해보험사의 의료자문 건수는 4만2274건으로 역대 최대 수준이었습니다.
문제는 의료자문 결과가 보험금을 감액 지급하거나 지급 거절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해 대부분의 손보사들이 의료자문을 실시한 이후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한 비율(부지급률)이 늘었죠. ▷관련기사 : [보푸라기]늘어나는 보험사 '의료자문'…보험금 삭감수단?(2022.04.30.)
의료자문은 자문의들이 보험사들로부터 자문료를 받기 때문에 공정성과 객관성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은 제안하지 못한 채 되레 금융당국이 의료자문을 보험금 지급 결정 근거로 전면에 내세운 게 문제라는 겁니다.
금소연은 "의료자문은 보험금 지급과 관련한 여러가지 참고 자료 중 하나지만 최종적인 보험금 미지급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소비자들의 주장을 외면하고 (금융당국이) 오히려 의료자문을 보험사 보험금 지급 결정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도록 운신의 폭을 넓혀 줬다"고 꼬집었습니다.
근본 해결책 비급여 관리는 '묵묵부답'
안타까운 것은 금융당국도 보험사도 실손보험 누수의 근본적인 대책인 '비급여 항목 관리'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급여 항목이란 건강보험에서 보장하지 않는 의료행위를 뜻합니다. 의료기관에서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 과잉진료와 보험금 과다 청구 문제의 주된 원인으로 꼽히죠.
이런 비급여 항목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지속 가능한 실손보험을 위한 정책 협의체'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죠. 하지만 지난 2월 한 차례 실무회의를 연 뒤 후속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건복지부와 금융당국이 손잡은 '공사보험정책협의체' 역시 유명무실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7년 복지부와 금융위가 주도해 만든 민관 합동 기구인 공사보험정책협의체는 문재인 케어(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이후에도 실손보험 만성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 입니다.
그나마 지난해 11월부터 금융당국과 보험업계가 TF를 구성해 9대 비급여 항목의 심사기준을 강화하는 가이드라인을 내놓기로 했잖아요? 그 답이 이번 보험사기 예방 모범규준 개정안이라는 게 씁쓸합니다.
결국 보험소비자에게 보험금을 늦게, 덜 주는 방식으로 지급심사 문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가장 나쁘게는 보험사기범으로 몰아갈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기도 하고요. 과잉진료 등으로 보험금 누수가 발생한다면 의료기관에 이런 점을 고치도록 대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금융감독의 본분은 규제가 아닌 지원"이라던 정은보 금감원장의 취임 일성이 불현듯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업무 등의 수행을 통해 건전한 신용질서와 공정한 금융거래 관행을 확립하고 예금자 및 투자자 등의 금융수요자를 보호함으로써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금감원의 설립 목적이 정 원장의 친시장 기조에 가려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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