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는 '친환경'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면에 '환경오염' 요인이 있음에도 말이다. 배터리가 대량 폐기되면 환경문제가 야기돼서다. 이같은 친환경 전기차의 역설을 해결하려면 폐배터리 재활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폐배터리 재활용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다. 국내에선 관련법 미비로 산업 활성화조차 어렵다. 비즈니스워치는 국내뿐 아니라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 유럽·미국 현지 취재를 통해 폐배터리 재활용 방안을 집중 분석하고, 친환경 전기차의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코마롬(헝가리)=백유진 김동훈 기자] 헝가리에 가면 배터리 전쟁터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차량 이동 기준 30분에서 1시간 거리에 배터리 관련 기업 대다수 공장이 자리하고 있다.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 북서쪽 코마롬에는 한국 배터리 기업 SK온의 1·2공장이 있다. SK온 공장 바로 앞에는 이차전지 소재 업체 재원산업 공장이, 인근에는 중국 전기차·배터리 업체 BYD의 전기차 버스용 배터리 공장도 가동 중이다.
헝가리 북쪽에 위치한 괴드에는 삼성SDI의 유럽 생산기지가 있고, 이곳에서 1시간 더 북쪽으로 달리면 배터리 재활용업체 성일하이텍의 유럽 전처리 공장이 있다.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발효하자 미국 진출이 막힌 중국 기업도 유럽으로 시선을 완전히 돌린 모양새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 배터리 사업자인 중국의 CATL이 헝가리 서쪽에 위치한 데브레첸에 역대 최대 규모의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SK온 코마롬 공장 관계자는 "배터리 공급이 아직 전기차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중국업체들이 큰 규모로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다"며 긴장감을 드러냈다.
배터리 기업 투자 유치에 '진심'
전세계 5위권 배터리 기업들이 헝가리에 모여드는 데는 헝가리 정부의 투자 유치가 큰 역할을 했다. 보조금 지급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덕이다.
HIPA(Hungarian Investment Promotion Agency, 헝가리투자청)는 2016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79억유로 규모의 배터리 제조 관련 거래 43건을 성사시켰다. 특히 2010년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 관계 구축을 위해 '동방개방정책'을 도입한 이후 동양권 기업들의 진출도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요 이스트반(Joó István) 헝가리투자청장은 비즈니스워치와의 인터뷰에서 "전기차로의 변화는 글로벌 경제 지형을 재정의하고 있고, 현재 대부분의 글로벌 투자는 동양권에서 비롯되고 있다"며 "헝가리 정부는 일찍이 두 가지 주요 추세가 세계 경제를 형성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수용, 이익을 얻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CATL이 대규모 투자를 발표한 것도 이 노력의 일환이다. CATL은 총 73억4000만유로를 투자해 헝가리에 연간 생산용량 100GWh(기가와트시)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이는 유럽 최대 규모의 배터리 공장이자, 헝가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그린필드(해외 자본이 투자 대상국의 토지를 직접 매입해 공장이나 사업장을 짓는 방식) 투자다.
이에 따라 배터리 생산기지로서 헝가리의 입지도 넓어질 전망이다. S&P(스탠더드앤드푸어스)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가 올 초 전망한 국가별 배터리 생산량을 보면 헝가리는 오는 2025년 67GWh, 2030년 97GWh를 생산할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헝가리는 CATL의 투자 결정으로 전망치를 웃도는 생산능력을 확보하게 됐다.
이스트반 헝가리투자청장은 "헝가리는 전기차 산업의 강국"이라며 "현재 50GWh 생산 능력을 확보하고 있고 2025년에는 150GWh까지 증가해 국가 기준 세계 3위 규모를 확보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유럽 전체에서 생산되는 배터리 생산량도 늘어날 전망이다. 생산·제조·소비가 역내에서 이뤄지는 구조를 갖추게 된 셈이다. S&P에 따르면 유럽의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 2020년 5.9%에서 오는 2030년 24.3%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중국의 점유율을 유럽과 미국이 나눠 갖는 모양새다. 미국의 경우 IRA 발효로 유럽 대비 성장세가 주춤할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 경제 살리는 韓 기업
한국 기업들도 헝가리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작년 한국 기업의 투자 규모는 27억5000만유로로 전체 외국인 투자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와 함께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투자자로 꼽히기도 했다.
이스트반 헝가리투자청장은 "현재 헝가리에서 한국 기업이 고용하고 있는 직원은 2만여 명에 달한다"며 "최근 CATL의 투자 발표 전까지 SK온이 이반차에 짓고 있는 30GWh 규모의 3공장이 헝가리 최대 규모의 그린필드 투자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수치는 헝가리 경제에서 한국 기업의 핵심적인 역할을 보여준다"며 "한국 기업의 존재는 기업 문화, 직장 윤리에 영향을 미치고 헝가리 전역의 수많은 사람에게 훌륭한 고용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SK온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SK온이 지금까지 헝가리에서 고용한 인원은 약 4000명에 육박한다. 헝가리 코마롬 SK온 배터리 공장에서 만난 루페르트 마르톤(Ruppert Márton) SK온 헝가리법인 HR 매니저는 "SK온은 성장 속도가 빨라 헝가리 경제, 특히 고용 시장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SK온은 현재 코마롬 지역에 1·2공장을 가동하고 있고 오는 2024년 가동을 목표로 이반차 지역에 3공장을 짓고 있다. 3공장의 연간 생산능력은 1·2공장을 합친 것(17.5GWh)보다 많은 30GWh 수준이기 때문에, 향후 고용 인원도 3000명 이상이 될 전망이다.
다만 현지 인력 중에서 전문 기술직을 채용하는 것은 난관이다. 기술직에 지원할 수 있는 현지 인재풀이 충분하지 않아서다. 이는 SK온이 3공장을 코마롬이 아닌 이반차에 건설 중인 이유기도 하다.
마르톤 매니저는 "현재 헝가리에서 엔지니어급 인력을 찾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인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이는 기계를 단순 조작하는 오퍼레이터(Operator)급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기업문화를 헝가리에 이식해야 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털어놨다. 마르톤 매니저는 "보통 1~2주면 의사 결정이 끝나는 유럽의 대다수 기업과는 달리 SK온은 의사 결정 과정이 엄격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며 "이러한 기업문화의 차이를 헝가리인들에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과제"라고 부연했다.
왜 기업들은 헝가리에 모일까
현지화 과정의 어려움에도 SK온을 비롯한 한국 기업이 헝가리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대표적인 것은 보조금이다.
이스트반 헝가리투자청장은 "HIPA(헝가리투자청)는 성장하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헝가리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기업에 여러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며 "투자자가 헝가리에서 원활하게 사업을 설립하고 재투자 및 확장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헝가리의 국가 보조금은 △지역 보조금 △교육 보조금 △R&D 보조금 등의 세 종류가 있다. 일부 보조금은 정부 차원에서 지급하지만, 지역 보조금은 유럽연합의 지역 지원 제도에 따라 각각 다른 비율로 지방 자치 단체에서 지급한다. 실제 SK온의 경우 헝가리에 진출해 총 3억2500만유로(약 4500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받았다.▷관련 기사: '쏟아지는 전기차'…SK온, 배터리 재활용 중요하게 보는 이유(9월16일)
그는 "특정한 경우에는 현금으로 지급되는 보조금 외에 세금 혜택도 있을 수 있지만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적합한 법적 조항을 찾아야 한다"고 첨언했다.
보조금 뿐만 아니라 동·서유럽에 접근성이 좋다는 지정학적 이점, 인근 국가 대비 저렴한 임금 수준도 투자 유치에 유리한 이유다.
한국수출입은행의 국가신용도평가리포트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헝가리의 1인당 평균임금 2만6223달러로 유럽 지역의 25개 OECD 회원국 중 24위 수준이다. 인접국들인 슬로베니아(4만220달러), 폴란드(3만1970달러), 체코(2만9281달러) 등보다 낮다. 외국인 투자에 개방적인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법인세율도 2020년말 기준 유럽 국가 중 최저인 9% 수준에 불과하다.
이스트반 헝가리투자청장은 "재정 지원은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일 뿐이며 헝가리는 합리적인 세금, 좋은 사업 환경, 강력한 인재 풀 등을 제공할 수 있어 기업들은 이 모든 요소를 함께 평가해 투자를 결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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