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가 연 900만대 넘게 쌓은 글로벌 생산체제에 칼을 댔다. 당장 판매 부진만 문제가 아니다. 자율주행·공유차 등 전에 없던 패러다임을 타고 격변 중인 완성차 시장에서 기존 생산체제 구조조정은 피하기 어려운 숙명이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노후 공장을 닫는 것은 전주일 뿐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 주도로 속도를 붙여가는 현대·기아차 생산체제 효율화의 배경과 개편 방향을 짚어본다.[편집자]
작년말 베이징(北京)현대 경영진은 중국 현지 신차 계획을 수정했다. 올해 9월부터 양산에 들어갈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신차 'ix25' 후속모델(개발명 SU2) 생산 라인을 충칭(重慶) 5공장으로 돌린 것이다. 중국 최대 전략차종인 ix25는 베이징 1공장에서 생산해왔고, 또 후속모델도 여기서 양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중 1공장을 접기로 하면서 계획을 미리 바꿨다.
베이징현대의 1공장 폐쇄는 사실 느닷없는 일이 아니다. 이 합자사가 허베이(河北) 창저우(滄州)에 4공장을 짓기로 한 2014년부터 이미 예고돼 있었다. 현대차가 애초 원했던 중국 4번째 공장은 지금 5번째 공장 입지로 밀린 서부지역 중심 충칭이다. 하지만 일자리와 세수를 위해 공장을 세워 달라는 허베이성의 제안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당시 시진핑(習近平) 정부는 '징진지(京津冀, 베이징-톈진-허베이 연계 발전)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마침 베이징현대에도 '화양연화'였다. 2008년 이후 연 판매량이 가파르게 늘어 2013년 이후 한 해 100만대 넘게 팔던 때다. 공장 가동률은 100%에 근접해 있었다. 그래서 창저우와 충칭이라는 두 신규투자 카드를 모두 받아들 수 있었다.
하지만 2002년 준공해 설비 노후화가 나타나고 있는 베이징 1공장을 언제고 접을 수 있다는 생각도 염두에 있었다. 베이징에 가까운 허베이성에 공장을 하나 더 두는 선택은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1공장 수명이 머지 않았음을 예측하게 한 배경은 또 있다. 이른바 '퇴이진삼(退二進三)'이라는 중국 정부의 도시·환경정책이다. 대기·수질 오염을 유발하는 2차 산업을 도시 밖으로 퇴출하고, 3차 산업을 진입토록 하는 게 이 정책 골자다. 토지 소유주인 정부가 부지 임대 만료 시점에 재계약을 해주지 않는 식이다.
베이징시도 역시 '수도 역할에 부합하지 않는 업종 조정과 생산설비 퇴출'이라는 명분을 걸고 기업 이전을 독려해왔다. 그래도 베이징현대 만큼은 압박이 덜했다. 현대차의 합자 파트너인 베이징자동차(北京汽車)가 베이징시 소유인 데다, 2002년 설립 이후 2015년까지 20만명 넘게 직접고용하고 1000억위안(17조원) 넘게 납세한 사회적 기여를 인정 받은 게 컸다.
이는 기아차 중국 합자사인 둥펑위에다(東風悅達)기아도 마찬가지다. 애초 시골이나 다름없던 장쑤(江蘇)성 옌청(鹽城)은 둥펑위에다기아의 성장이 곧 도시 성장이었다. 이 도시에 집중된 3개의 공장중 가장 먼저 생긴 1공장은 시정부 청사와 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시내 복판에 있다. 역시 도시·환경정책 변수에 위에 올려져 있던 셈이다.
둥펑위에다기아 1공장 역시 이르면 오는 5월 생산라인을 멈춰세울 예정이다. 현지 매체들은 합자 파트너중 위에다그룹(悅達集團)의 계열사 화런윈퉁(華人運通)이 이를 인수하거나 임대해 전기차 생산 등에 활용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130만대 넘는 '잉여 생산능력' 도마에
적자 쌓이며 본사 실적에도 악영향
현대·기아차가 각각 중국 합자사 1공장을 접은 결정적 이유는 사업 효율성이 급격히 떨어진 데 있다. 100%를 넘보던 공장 가동률이 50% 밑으로 고꾸라진 게 가장 크다. 매출도 반토막 나고 본사에까지 적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악화된 최근 2년여실적이 구조조정의 배경에 깔려있다.
특히 그룹 안팎에서 흘러 나오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직접 '칼자루'를 쥐었다"는 말은 중국 상황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그는 2017년 중국에서의 부진을 두고 이듬해초 "굉장히 심각했지만 좋은 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작년에도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자, 9월 수석부회장 승진 직후 중국사업 라인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는 쇄신인사부터 단행했다.
상황은 숫자로도 뚜렷이 나타난다. 현재 베이징현대 1~5공장과 상용차 합자사 쓰촨(四川)현대를 통틀어 현대차가 갖춘 중국에서의 연간 총생산능력은 181만대다. 하지만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이후 재작년과 작년 판매량(도매 기준)은 80만대 수준으로 줄었다. 공장 가동률은 45% 안팎에 그치는 것이다.
기아차 역시 마찬가지다. 둥펑위에다기아의 옌청 1~3공장의 총생산능력은 연 89만대지만 공장 출고는 재작년 36만6대, 작년 37만1263대에 그쳤다. 가동률로 따지면 베이징현대보다 낮은 40% 안팎이다.
이는 재무제표상의 실적 악화로도 이어졌다. 2014~2016년 20조원을 넘나들던 베이징현대의 매출은 이듬해 12조1491억원, 그 다음해인 작년 11조438억원으로 반타작 났다. 순이익도 2014년 이전에 1조원 쉽게 넘겼지만 재작년에는 1594억원 순손실로 적자를 봤고, 작년에는 123억원 순이익을 낸데 그쳤다.
둥펑위에다기아도 2014년부터 3년간 매출이 10조원에 육박했지만 2017년에는 4조7711억원, 작년에는 이보다도 더 줄어든 4조6481억원까지 떨어졌다. 2017년 이후 연속 적자를 낸 결과 2년간 누적 순손실은 3907억원에 달한다. 이는 기아차 연결재무제표에 재작년 1365억원, 작년 268억원의 지분법 손실로 적히는 악영향을 끼쳤다.
중국판매 연 180만대로 늘리거나
생산능력 연 150만대까지 감축해야
더 큰 문제는 회복 기미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베이징현대는 올해 들어 2월까지 누적 판매 7만51대를 기록중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9만5605대에 비해 26.7%나 더 감소한 것이다. 둥펑위에다기아의 경우 올해 1~2월 5만2204대를 판매해 소폭이나마 작년 수준(5만1658대)은 상회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중국 시장에 상품 경쟁력을 갖춘 신차를 투입해 중국 소비자를 다시 끌어모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판촉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어렵다. 이원희 현대차 사장은 지난달 말 가진 기업설명회 'CEO(최고경영자) 인베스터 데이'에서 중국 합자사 재고 해소 등을 위해 쓰던 딜러 보조금 등의 판촉 비용도 줄여 사업을 효율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작년부터 남는 중국 생산물량을 동남아 등지로 돌려 수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 역시 진척이 없다.
이는 두 합자사의 1공장을 닫는 것 만으로 생산체제 구조조정이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두 합자사를 합친 생산능력은 총 270만대인데 줄이기로 한 설비는 44만대분, 전체의 16.3% 수준이다.
완성차 업계에서는 수지타산을 맞추는 마지노선을 공장 가동률 80% 수준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선택지는 두 개로 압축된다. 현대·기아차 중국법인이 각 1공장을 폐쇄한 걸 기준으로 연간 판매를 180만대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다른 하나는 생산능력을 150만대 규모까지 더 감축하는 것이다. 판매를 급격히 늘리지 못하면 공장 2~3곳을 더 닫아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시장에서는 중국 생산설비 구조조정 규모가 커질 수록 현대·기아차 수익성은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강성진 KB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1공장이 올해 5월부터 가동을 중단하면 베이징현대 전체 가동률은 종전보다 7%포인트 개선된다"며 "가동률이 1%포인트 개선될 때마다 베이징현대의 순이익은 2억1000만위안(357억원)씩 늘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치 않다. 현대차 한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일자리 확보는 사회 문제의 핵심이어서 생산 구조조정이 자칫 한국GM의 군산공장 폐쇄처럼 중국에서의 '먹튀'로 비칠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현대속도', '현대품질'이라는 말과 함께 다져온 중국 시장에서의 입지도 사드 후폭풍 이상의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