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코리아세일페스타 기자간담회' 관련 안내 사항 전달드립니다. 한국백화점협회의 기자간담회 참여가 확정됐습니다." (2019년 10월 23일, 코리아세일페스타 추진위원회)
지난 23일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표방하는 코리아세일페스타(이하 코세페) 추진위원회에서 메일 한 통을 보내왔습니다. 백화점협회 참여가 확정됐다는 내용이었는데요. 24일 기자간담회를 하루 앞두고 보낸 다급한 '편지'였습니다.
코세페는 올해로 5회째를 맞는데요. 지난 정부에서 소비 진작과 내수 활성화 차원에서 시작했던 행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처음으로 '민간 주도'로 기획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간 산업통상자원부 주도로 이뤄졌지만 올해는 위원회를 만들어 민간이 자율적으로 추진했다는 건데요. 정부 주도로 기업들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만든 탓에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지적을 의식한 대응책입니다.
그런데 오프라인 업체 위주의 코세페에서 가장 중요한 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백화점 업체의 참여가 기자간담회 하루 전에 급하게 정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화점 업체의 참여 여부'가 이슈가 된 이유나 이후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이 행사가 이름만 '민간 주도'였지 사실은 명확한 '정부 주도' 행사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백화점 업체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앞서 공정거래위원회는 오는 31일부터 '특약매입 지침' 개정안이라는 걸 시행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 개정안에는 백화점이 할인행사를 할 때 그에 따른 비용을 절반 이상을 부담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백화점과 제조업체가 절반을 부담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그간 그렇게 하지 않았던 백화점 입장에서는 당장 비용이 늘어나게 생겼으니 아예 할인 행사 자체를 하지 않겠다며 반발하는 분위기입니다. '할인 행사를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이런 와중에 '대대적인 할인 행사'인 코세페에도 참여할 이유가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백화점 업체들은 이 행사를 보이콧하려 했던 겁니다. 항의의 제스처인데요. 이 항의는 누굴 향한 것일까요. 당연히 정부를 상대로 한 겁니다. 코세페가 민간이 주도한 행사였다면 백화점 업체들이 괜히 여기에 대고 심술을 부릴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백화점이 이 행사 참여를 보이콧했다는 것은 코세페가 정부 주도 행사라고 판단했다는 방증이 됩니다.
백화점 업체들은 어쨌든 기자간담회 하루 전에 부랴부랴 행사 참여를 결정했는데요.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백화점 업체들이 내놓은 계획을 보니 할인이 아닌 경품 행사 위주라는 점입니다. 백화점에 와서 물건을 구매하면 소정의 사은품을 준다는 식인 겁니다. 블랙프라이데이와는 한참 거리가 먼 방식입니다. 억지로 참여하는 듯한 인상이 주는 게 사실입니다.
한국백화점협회 측은 이날 간담회에서도 이런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신치민 백화점협회 상무는 "공정위 심사 지침이 백화점 영업이나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라 백화점협회가 참여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게 사실"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진위의 간곡한 요청과 백화점도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해보자고 생각해서 참여하게 됐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코세페가 '반쪽' 행사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할인 없는 할인 행사가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코세페 측은 이에 대해 다시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코세페는 "백화점 업계는 코세페에 적극 참여한다"며 "이벤트와 함께 다양한 세일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일 행사의 품목과 할인율, 그리고 다양한 이벤트의 세부 내용과 일정은 개별적으로 홍보가 이뤄질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급하게 참여를 결정한 탓인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할인 행사는 한다는 설명입니다. 백화점 업체들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행사를 기획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어디선가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정부가 기업들을 끌어모아 대규모 행사를 기획할 때 이런 경우가 종종 있죠. 굳이 참여하고 싶지 않은 업체들이 처음에는 불참할 거라고 공언하다가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에는 참여하게 되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코세페 측은 내달 1일부터 22일까지 약 3주간 행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코세페 측은 그러면서 지난 23일 기준으로 600여 개의 유통·제조·서비스 업체가 참여하기로 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해 451개와 비교하면 크게 늘어난 규모입니다.
기업들이 많이 참여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 주도로 기업 참여 행사 등을 추진할 때면 항상 몇 개 기업이 참석했다는 식으로 실시간 카운팅을 하곤 합니다. 규모만 커지면 더 성공적이라는, 보여주기식 행정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11월은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중국 광군제가 있는 전 세계적인 '쇼핑의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다 보니 국내 소비자들도 해외 직구 등을 통해 지갑을 여는 경우가 많고요. 그래서 국내 이커머스 업체들의 경우 이에 맞서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진행해왔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오프라인 업체들도 가세하고 있고요.
이런 와중에 정부가 나서서 '코리아세일페스타'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걸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실제로 유통업체들은 자체 할인 행사에 더욱 집중하거나 아니면 원래 하려던 행사를 코세페로 이름만 바꿔서 진행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되려 백화점 업체들과 정부의 갈등이 부각되는 등 잡음만 일으키고 있는데요. 안 그래도 소비자들은 '말만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지 할인율이나 품목이 너무 제한적'이라며 코세페를 외면해왔습니다. 이번 일들로 국내 유통업계에 대한 불신만 더욱 커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