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이달 중순 농심이 '추석 이후 가격 인상'을 선언한 데 이어 팔도도 오는 10월부터 가격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8월 오뚜기를 시작으로 농심과 팔도, 삼양식품이 줄줄이 라면 가격을 올린 지 1년 만이다. 한 곳이 가격을 올리면 기다렸다는 듯 뒤따르는 라면업계의 생리 상 오뚜기와 삼양식품도 가격 인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얼마나 올랐나
팔도는 오는 10월 1일부로 라면 12종의 가격을 평균 9.8% 인상한다고 밝혔다. 주력 제품인 팔도비빔면이 9.8% 오르고 왕뚜껑은 11.0% 인상된다. 팔도는 지난해 9월에도 주요 제품 가격을 평균 7.8% 인상한 바 있다. 만 1년 사이에 두 차례나 가격을 올리면서 사실상 인상폭이 20%를 웃돌게 됐다. 지난 3월 출시한 꼬간초비빔면·꼬들김비빔면도 출시 반 년 만에 가격을 6.7% 인상했다. 이번 가격 인상이 팔도로서도 예상 밖의 결정이었다는 의미다.
농심도 마찬가지다. 농심은 추석 이후인 9월 15일부터 주요 라면 가격을 평균 11.3% 올릴 계획이다. 신라면이 10.9%, 너구리가 9.9% 오른다. 지난해 8월에는 신라면 7.6% 등 평균 6.8% 인상했다. 두 차례 인상으로 대표 제품인 신라면 가격은 지난해 8월 676원(대형마트 기준)에서 807원으로 19.3% 오른다.
불과 1년 사이 가격을 두 차례나 올린 건 라면업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라면은 '서민 식품'이자 '비상 식량'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10~20원의 가격 인상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오뚜기의 경우 지난해 초 가격 인상을 결정했다가 소비자 반발에 황급히 인상을 백지화하기도 했다. 그만큼 소비자들의 반발이 컸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해 8월 릴레이 가격인상 전까지 라면업계는 쉽사리 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농심은 2016년 인상 이후 5년 만의 인상이었고 삼양식품과 팔도도 각각 2017년, 2018년이 마지막 인상이었다. 매년 가격이 오를 지 관심사였던 오뚜기 진라면은 무려 13년 4개월 만에 가격을 올렸다.
1년 전에는 왜
지난해 라면업계의 가격 인상은 '신이 내린 타이밍'으로 보였다. 우선 10년 넘게 가격을 동결했던 오뚜기가 선봉에 섰다. 연초 한 차례 저항에 부딪혔지만 여름 들어 밀가루 가격이 크게 오르자 더이상 견디지 못했다. 결국 7월 15일 평균 10%를 웃도는 가격 인상안을 발표했다.
'착한 가격'의 대표 주자 오뚜기가 가격 인상을 결정하자 나머지 업체들도 거리낄 것 없이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오뚜기의 가격 인상 발표 2주 후인 7월 29일엔 농심이 가격 인상을 선언했다. 다시 2주 후인 8월 13일에는 팔도와 삼양식품이 나란히 인상안을 내놨다. 네 개 업체 모두 "원가 상승 부담을 감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밀가루 등 국제 원재료 가격이 급등해 불가피하게 가격을 올리게 됐다"고 밝혔다.
라면업계의 가격 인상에는 근거가 있다. 2020년 6월 톤 당 183달러였던 밀가루 가격은 2021년 6월 246달러로 34% 급등했다. 톤당 700달러선이었던 팜유 가격도 1100달러대로 치솟았다. 라면은 밀가루로 면을 반죽해 팜유로 튀겨낸다. 핵심 원재료들의 가격이 배 가까이 뛰면서 원가 압박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국제 물류비도 급등했다.
라면업계뿐만 아니라 다른 식품 기업들도 줄줄이 가격 인상에 나섰다. 라면업계만큼이나 밀가루와 팜유를 주로 쓰는 해태제과와 롯데제과 등 제과업계는 9월 들어 가격을 10%가량 올렸다. 유(乳)업계도 서울우유를 시작으로 매일유업, 동원F&B 등이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9월 말에는 LG생활건강, 웅진식품 등 음료업계도 가격표를 고쳤다. CJ제일제당, 풀무원 등 가공식품 업체들도 뒤를 따랐다.
'1년만 참을 걸'…예상치 못한 전쟁
문제는 올해 들어 밀가루와 팜유 등의 가격 인상폭이 더 가팔라졌다는 점이다. 전세계 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탓이다. 전쟁이 시작되며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량은 80% 급감했다. 물량이 바닥나며 밀 가격도 급등했다. 지난 6월 기준 국제 밀 가격은 전년 대비 58.9% 오른 톤 당 391달러에 달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배 이상 올랐다.
지난해 정점을 찍은 줄 알았던 팜유 가격도 끝없이 솟구쳤다. 지난해 1100달러선에서 올해 1500달러를 돌파했다. 이 역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다. 팜유 가격 급등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팜유 수출을 제한하자 대형마트에서 식용유가 동나는 '식용유 대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가격 인상을 단행한 라면업계에겐 난감한 상황이었다. 원재료 가격이 정점을 찍고 떨어질 것으로 보고 인상폭을 계산했지만 예상을 크게 벗어나며 가격 인상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업계 1위 농심은 2분기에 별도 기준(국내 실적)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농심이 적자를 낸 건 1998년 2분기 이후 무려 24년 만이다. 한 차례 가격 인상에 나서고도 원가율 상승을 해소하지 못한 농심은 결국 재차 가격 인상 카드를 꺼내들었다.
농심 관계자는 "그간 라면과 스낵 가격이 소비자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내부적으로 원가절감과 경영효율화를 추진하는 등 원가인상 압박을 감내해왔지만 2분기 국내에서 적자를 기록할 만큼 가격조정이 절실한 상황이었다"며 "특히 협력업체의 납품가 인상으로 라면과 스낵의 가격인상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소비자 장바구니 물가 안정을 감안해 추석 이후로 늦췄다"라고 강조했다.
다음 타자는 누구?
라면업계의 원가 부담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올 초 인상된 가격이 이제야 실적에 반영되고 있어서다. 식품회사들은 일반적으로 3~6개월 전에 원재료를 미리 구입한다. 최소 연말까지는 원가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원재료를 달러로 구매하는 만큼 달러당 1380원을 웃도는 환율도 실적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비슷한 시기에 가격 인상에 나섰던 오뚜기와 삼양식품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오뚜기는 지난해 9월 평균 11.9%의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대표 제품인 진라면은 12.6% 인상해 주요 라면 브랜드 중 인상폭이 가장 높았다. 삼양식품은 평균 6.9%를 올렸다. 대표 제품인 불닭볶음면은 9.6% 인상했다.
오뚜기의 경우 3~5년마다 가격을 올렸던 경쟁사와 달리 13년 만에 가격을 인상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인상폭이 높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올해 상반기 실적은 좋았지만 라면보다는 소스·HMR 등 기존 효자상품의 선전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지난해 한 차례 홍역을 겪은 만큼 가격 인상 이슈에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오뚜기 관계자는 "아직 가격 인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해진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불닭볶음면의 해외 시장 선전에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는 삼양식품은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가격 인상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2분기 사상 최대 실적에도 불구, 국내에선 크게 이익을 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적자를 냈던 농심과 달리 오뚜기와 삼양식품은 올해 호실적을 내고 있어 가격 인상에 나서기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경쟁사들의 가격 인상 이후 반응을 확인하고 움직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