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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퇴직연금 헐어 집 사는 사람들

  • 2019.12.31(화) 11:14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퇴직연금통계에 따르면 작년 한해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한 가입자 수는 7만2000명이다. 직전해 5만2000명에서 38.1% 증가했다. 지난해 중도인출 규모를 금액으로 따지면 2조6000억원에 달한다.

중도인출 사유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주택 구입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중도인출자 수의 35.0% 정도다. 장기 요양을 위한 중도인출 비중은 34.8%로 주택 구입과 비슷하다. 주거 임차 보증금 21.2%, 희생 절차 개시 8.9% 순이다.

주택 구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데는 최근 은행 대출 요건이 까다로워진 점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집을 사긴 해야 하는데 대출 창구가 막혀버리니 수년간 모아놓은 퇴직연금을 깰 수밖에 없는 것이다.

퇴직연금제도는 퇴직급여를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했다가 근로자 퇴직 시기에 맞춰 해당 적립금을 제공토록 한 제도다. 재원 고갈 우려가 끊이지 않는 국민연금과 달리 매년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고령화 사회를 지탱할 재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약 190조원으로 10년 내 2배 이상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역할과 규모에 비해 운용 실적은 민망한 수준이다. 작년 시중은행 퇴직연금 연평균 수익률은 1% 중후반대로 예·적금 금리 수준에도 모자란다.

무엇보다 원리금보장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는 탓이 크다. 원리금보장상품은 원금손실은 거의 없지만 그만큼 수익률도 작아진다. 업계와 정부는 실적배당형 상품 가입을 권유하고 있지만 금융투자로 자산을 형성한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낯설 뿐이다.

이에 반해 수도권 아파트를 필두로 한 부동산 투자는 훨씬 친숙하다. 어머니는 봉제로 아버지는 택시로 생계를 꾸리면서 은행 대출을 받아 서울 변두리에 집 한 채 사놓으면 자식 시집 장가보낼 차익 정도는 실현했다는 '불패' 트랙 레코드도 있다.

투자는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야 손실 가능성이 가장 적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퇴직연금을 주택 구입에 보태 굴리는 것은 일견 합리적이다. 최근 자본시장은 파생상품, 사모펀드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불안감도 키운다.

그렇다면 부동산이 대안일까. 전문가들은 부동산 투자는 주식 종목 하나를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주가를 움직이는 요소는 한두 개가 아니다. 먼 나라 대통령 한 마디와 강원도 궂은 날씨에도 위아래로 출렁이는 게 주가다.

시장 상황도 예전 같지 않다.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 턱걸이 수준이다. 노동인구는 줄고 평균수명은 늘어난다. 경제 성장 동력이 약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주택 가격이 뛰던 시대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물론 주택 구입을 위해 중도인출을 하더라도 개개인마다 사정이 제각각이라는 점은 간과해선 안 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연금을 깬 사람들이 적지 않을 수도 있다. 무주택자의 서러움도 결코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직연금이 주택자금으로 흘러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나고 나면 언제 이렇게 빨랐나 생각이 드는 게 시간이다. 시대가 바뀌고 시장이 격변하는 가운데 결국 은퇴 시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연금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 윤택한 노후를 맞이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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