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앞으로 다가운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를 앞두고, '주총 평론가' 격인 의결권분석자문사들의 입장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번 임시주총의 판세를 가를 핵심 안건은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변경이다. 집중투표 도입 안건 통과 여부에 따라 이사선임 방식의 '룰'이 달라진다. 따라서 집중투표제 도입 여부가 경영권 분쟁을 '단판승부'로 끝낼지 '연장전'으로 몰고갈지 방향을 가른다.
의결권 경쟁에서 밀리는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일반적인 이사 선임 방식(의결권을 모두 인정한 상황에서 보통결의)으로 표대결하면 영풍·MBK측 이사후보가 대거 진입하는 것을 막기 어렵다.
하지만 선임할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로 대결하면 '1인 1표'의 원칙이 사라지기 때문에 영풍·MBK측의 이사회 진입을 원천봉쇄하긴 어려워도 과반을 차지하는 것은 방어할 수 있다. (아래 관련기사 참고)
▷관련기사: 한달 남은 고려아연 임시주총...최윤범 '노림수'와 MBK '경우의수'(2024년 12월 25일)
집중투표 도입을 위한 정관변경 안건은 특별결의인 동시에 주주별로 최대 3%까지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3%룰' 적용을 받는다. 영풍·MBK 측은 개별지분율 3%를 초과하는 주주(영풍, MBK, 장형진)가 많은 반면 최윤범 회장 측은 단 한명의 주주도 3%를 넘지 않고 분산되어 있어 유리한 표결 방식이다.
그렇지만 최 회장 측이 단독으로 특별결의 요건(출석주주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충족할 수는 없다. 최 회장의 우군들이 모두 고려아연의 손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특별결의 요건에 못 미친다.
다른 소수주주의 표를 확보해야 하는 숙제가 남는다. 주요주주가 모두 찬성하더라도 다른 소수주주의 찬성표를 더하지 못한다면 특별결의 사항인 정관변경이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수주주가 이번 경영권 분쟁의 승패를 가를 집중투표제 도입의 '캐스팅보터'인 상황이다. 소수주주는 개인 뿐만 아니라 기관투자자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들은 주총안건 찬반 결정에 앞서 국내외 의안분석자문사(의결권 자문기관)의 보고서를 참고한다.
의안분석자문사의 의견을 반드시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러갈지 말지 판단할 때 평론가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과 유사하다.
특히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 지침)를 도입한 기관투자자라면, 판단의 근거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필수참고서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국내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공시를 강화하는 추세도 의안분석자문사의 기능을 높이는 요인이다.캐스팅보터 움직이는 자문기관... ISS는 집중투표 반대
글로벌 1위 자문사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는 가장 먼저 집중투표제 도입에 반대할 것을 권고했다.
ISS는 "집중투표제는 일반적으로 소액주주에게 유리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영풍·MBK측이 추구하는 고려아연에 대한 변화와 영향력을 희석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집중투표제가 현 경영진(최윤범 회장 측)이 선호하는 이사후보를 선임하고 이를 통해 MBK·영풍 측이 추구하는 바를 약화시키는 도구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아래 관련기사 참고)
▷관련기사: ISS, 고려아연 집중투표제 도입 반대…MBK측 후보 4명 찬성(1월 10일)
국내 자문사 중 가장 먼저 안건분석을 공개한 한국ESG평가원은 집중투표제 도입을 포함해 고려아연 측에 모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아직 시장 영향력이 크지 않은 곳이다. 아울러 최근 의안분석 시장에서 도입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이해상충 방지' 규정을 공표하고 있지도 않다.
국내자문사 가운데 기관 영향력이 높은 지배적 사업자, 즉 메이저 자문사는 한국ESG기준원(구 한국기업지배구조원), 한국ESG연구소(구 대신경제연구소), 서스틴베스트이다.
이들 3사는 각사 홈페이지에 독립성과 객관성 확보를 강조하는 이해상충 방지규정을 공표하고 있으며, 3사 공동으로 자율규제협의체(간사 서스틴베스트)를 구성해 운영중이다. 3사 가운데 일부는 이번주 고려아연 임시주총 관련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다른 곳도 기관투자자에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배포할 것으로 보인다.
평범한 안건이 변수로... 작년 '정관변경'과 유사한 '집중투표 도입'
경영권분쟁의 전초전이었던 지난해 고려아연 정기주총 당시 의견을 살펴보면 의안분석자문사들이 어떤 시각을 가졌는지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ISS는 지난해 고려아연 정기주총에서 핵심 안건이었던 정관변경 안건에 대해 반대의견을 냈다.
당시 고려아연은 '경영상 필요로 외국 합작법인에 신주를 발행할 수 있다'는 정관 문구를 '신기술 도입, 재무구조 개선 등 회사의 경영상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경우 특정한 자에게 신주인수 청약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로 바꾸려 했다.
반면 영풍은 '사실상 제한없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가 가능해져 기존주주의 주주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점에서 반대했다. ISS도 같은 의견을 들어 반대를 권고한 것이다.
당시 정관변경 안건과 이번 임시주총의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변경 안건은 유사한 쟁점을 갖는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의안분석자문사들이 무난하게 찬성할 수 있는 안건이지만, 고려아연처럼 경영권분쟁이란 특수상황에서는 다른 변수가 가치 판단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작년 고려아연이 추진했던 정관변경은 대다수 상장사가 채택하는 '표준정관'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주주들은 물론 의안분석자문사들도 반대할 이유가 굳이 없는 안건인 셈이다. 심지어 해당 정관변경을 반대했던 영풍마저도 2019년 정기주총에서 같은 내용의 정관변경을 먼저 도입했다.
다만 앞서 고려아연은 한화, 현대차, LG화학 등과 자사주 교환, 증자 등을 통해 다른 주주의 지분율을 희석하고 최윤범 회장의 지배력을 상대적으로 높여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작년 정기주총에서 ISS가 반대한 이유는 정관변경 문구를 교과서적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그로인해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추가로 실시할 가능성까지 따져서 판단한 것이다.
이번 집중투표제 도입도 상황이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집중투표는 소수주주 보호를 위한 제도로 평가받는다. 노골적으로 회사측 편향 성향을 가진 곳이 아니라면, 정상적인 의안분석자문사들은 주주권익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찬성을 권고하는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영권분쟁 상황에 집중투표는 교과서에 나온대로만 쓰이지 않는다. 의결권 경쟁에서 밀리는 최윤범 회장 측이 영풍·MBK의 이사회 대거 진입을 늦추기 위한 방패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방패의 목적이나 효과가 고려아연 이사회의 기능, 주주가치 제고 등에 도움이 되는지 한번 더 판단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ISS는 작년에 그랬듯이 이번 임시주총에서도 집중투표를 교과서적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경영권분쟁이란 특수 상황에 무게를 두고 판단한 것이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지 않는다면?
국내 의결권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도 ISS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고려아연 정기주총에서 제3자배정 신주발행 대상을 확대하는 정관변경에 반대를 권고했다.
고려아연이 도입하려던 정관은 대다수 상장사가 채택하는 '표준정관'을 복사한 수준임에도 당시 서스틴베스트는 신주발행 대상 확대가 일반주주 이익과 무관한 경영권 보호 목적으로 이용될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대의견을 냈다.
마찬가지로 한국ESG연구소도 지난해 같은 안건에 대해 반대를 권고했다. '주주권리가 희석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서스틴베스트와 비슷한 이유다.
따라서 서스틴베스트, 한국ESG연구소가 작년과 같은 논리를 유지한다면 이번 임시주총에서는 집중투표 도입 안건에 반대하는게 자연스럽다.
반면 한국ESG기준원과 글로벌자문사 글래스루이스는 작년 정관변경 안건에 대해 찬성 의견을 냈다. 이들은 구체적인 찬성 이유를 밝히진 않았지만, 분쟁 상황에 대한 가중치를 높게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작년과 같은 논리라면 한국ESG기준원과 글래스루이스는 이번 집중투표제 도입에도 최윤범 회장의 손을 들어주는 찬성 의견을 내는게 맞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논조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한편 지분율 축소로 캐스팅보터로서의 영향력은 다소 줄었지만 '3%룰'로 진행하는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이 살아있는 국민연금의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도 관건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주총에서 정관변경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만 이번 주총은 과거 의결권 사용내역을 통해 의중을 살피는 것은 어려울 전망이다. 국민연금은 이번 사안에 대해 기금운용본부가 결정하지 않고,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를 오는 17일 오후에 개최해 고려아연 임시주총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경영권 분쟁이 과열되는 상황인 만큼 신중한 회의를 통해 의결권 방향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